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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Jun 03. 2024

휴전 중인 국가의 서점은 달라도 다르다

책의 제목은 그 책의 얼굴이자 정신이다

서점에 가면 아직 우리나라가 휴전국이라는 실감이 든다. 어쩌면 전쟁기념관보다 더 위기의식을 들게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매대에는 '무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즐비하다. 마치 자기 복제를 하는 세포처럼 말이다. 최근 북한의 대남 전단지 살포와 같은 도발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서점 풍경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무기 수출국으로, 최근에는 폴란드에 FA-50 경공격기, K2 흑표 전차, K9 자주포 등을 대거 수출하며 방위산업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와 군사적 열기가 출판계에도 스며들어, '무기'를 앞세운 책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는 건 아닐까.


'무기가 되는 스토리'를 필두로, '당신의 OO는 무기가 된다', '무기가 되는 토론 OO', '무기가 되는 OO 수업', 'OO이 무기가 되는 순간', 'OO의 무기가 되는 심리학', 'OO와 무기가 되는 철학', '무기가 되는 글OO' 등 수십 종의 책이 단기간에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유사 제목의 책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중이다. 출판사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기'라는 자극적인 키워드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형국이다.


출판사들이 '무기'라는 단어를 책 제목에 붙이는 이유는 소비자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심리학의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로 설명 가능하다. 단순 노출 효과란 사람들이 특정 대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될수록 그 대상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로버트 재이온스(Robert Zajonc)는 1968년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했는데, 사람들은 이전에 접했던 것들, 즉 익숙한 것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들이 '무기'와 같은 익숙한 단어를 책 제목에 끊임없이 노출시키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미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제목에 사용된 '무기'라는 단어에 독자들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무기' 열풍에 편승한 신간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려는 것이다. 낯선 책도 제목이 익숙하다면 독자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심산인 듯하다.


또한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의 설득 심리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회적 증거(Social Proof)'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한 것을 보면 자신도 무의식 중에 그 선택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미 널리 읽히고 있는 '무기' 열풍에 동참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겠구나'라는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셈이다.



그저 상업적 욕심에 눈이 멀어 유행에 편승하는 식의 책 제목 짓기는 독자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부실한 책들은 오히려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작가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게 한다. 더군다나 외국 서적을 번역할 때 원제와는 동떨어진 제목을 붙이는 행태는 독자들을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작가가 담고자 한 메시지와 작품의 정수를 훼손하면서까지 상업성을 추구하는 출판사의 근시안적 태도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건강한 출판문화를 위해서라도 출판사들은 마음가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책의 본질에 충실한 제목 짓기에 매진해야 할 때다. 책의 내용을 함축하면서도 작가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제목을 고민해야 한다. 내실 없는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책의 알맹이에 공을 들이는 자세가 요구된다. 책의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출판사도 수익을 내야 하는 기업인 만큼 상업성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는 출판계 전체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독자와 성실히 소통하며, 책의 본래적 가치에 무게를 싣는 태도야말로 출판사의 지속가능한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책의 제목은 그 책의 얼굴이자 정신이다. 책의 얼굴에 철저히 진실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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