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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Jul 08. 2024

새로 사귄 동네 친구 화영 씨는 1947년생이다

"집에서 놀면 뭐해요. 심심하기만 하지."

노을이 물든 퇴근길, 재개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거리를 걸었다. 좁고 침울한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이 길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존재감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묘한 향수를 느꼈다.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의 골목길이 겹치며 추억의 조각들이 마음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한 곳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간판 하나 없는 허름한 분식점. 지난 1년 반 동안 이 길을 지나면서도, 그 문이 열린 것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재개발을 기다리며 손님이 끊겨 문을 닫은 줄로만 알았던 그곳에서, 오늘따라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좁고 어두운 실내로 몸을 구겨 넣었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의외로 넓고 아늑했다. 그곳에는 주름진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사장님, 오늘 문을 여신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에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그러게 말이에요. 열었으니까 들어왔겠죠?"


할머니의 알쏭달쏭한 답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주문을 했다.


"떡볶이 포장 가능한가요? 혹시 카드가 안 되면 입금할게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벽 한쪽에 붙어있는 농협 계좌번호였다. 그 옆에는 '민화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상가의 벽과 대조되어, 너무나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내 시선이 그 이름에 오래 머물자, 사장님께서 먼저 입을 여셨다.


"이름 예쁘죠? 저거 진짜 제 이름이에요."


나는 아직 질문을 던지기도 전이었지만, 사장님은 이미 대답을 하셨다. 긴 대화를 피하고 싶었지만, 한번 트인 대화의 물꼬는 돌이킬 수 없었다.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작가 조인후


"그렇게요. 저는 당연히 따님 이름인 줄 알았어요."


사장님은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마음에 드셨는지, 이야기보따리를 계속 풀어내셨다.


"제가 이래 봬도 47년생이에요. 4살 때 전쟁 나서 개성에서 내려왔죠."


그 말을 듣자 나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린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내려오셨을 그 시절의 아픔이 느껴졌다.


"가족들도 모두 무사히 내려오셨나요?"


"네, 다행히 형제자매가 많지 않아서 다들 잘 내려왔어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이제는 다 과거가 되었어요."


할머니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그런데 여기 꽤 오랫동안 문을 닫고 계셨던 것 같은데, 다시 문을 여신 건가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하셨다.


"사실은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많이 쉬었어요. 한 번은 갈비뼈가 부러져서 몇 달을 쉬었고, 그다음에는 넘어져서 다리를 다쳐서 또 몇 달을 쉬었죠. 그러다 보니 가게를 여는 날보다 문을 닫는 날이 더 많았네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동안 문이 닫혀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문을 열고 장사를 하시는 모습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요즘엔 손님이 적어서 음식을 많이 준비 안 해요. 조금만 기다려봐요."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작가 조인후


떡볶이와 순대를 다시 데우는 동안, 할머니는 이 가게의 역사를 들려주셨다.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원래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분식집을 했어요. 몇십 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했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한다고 하더라고요. 상가가 철거되면서 이리로 옮겨 왔어요."


할머니의 담담한 말씀에 나는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그 자리에 지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오랜 삶의 터전을 빼앗은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왜 다시 가게를 하시는 거예요?"


내 질문에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다.


"집에서 놀면 뭐해요. 심심하기만 하지. 난 돈보다 내가 만든 음식 남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게 행복이에요."


그리고는 떡볶이와 순대를 이쑤시개로 찍어 내 입에 넣어주셨다. 수많은 떡볶이 집을 가봤지만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때 벽면에 크게 붙은 지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 직접 배달을 하기엔 무리일 텐데, 그것도 재건축 이전의 오래된 지도였다.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작가 조인후


"그런데 여기 벽면에 지도는 뭐예요?"


"원래 있던 거예요. 여기 건물주가 이 자리에서 부동산을 했거든요. 이제 나이 많이 드셔서 더 이상 일을 안 하시죠."


"이 지도를 떼자니 도배를 새로 해야 하는 것도 힘들 것 같고 마침 지도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냥 뒀어요. 어때요? 나쁘지 않죠?"


할머니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분식집 내부를 둘러싼 지도들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분식집에 들어오며 할머니와의 대화를 주저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언젠가 이 골목길을 지나며 이 분식집이 영영 문을 닫은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47년생 화영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강인함과 삶에 대한 애정이 이 작은 분식집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사귄 동네 친구의 가게를 나서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민화영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이 분식집을 운영하시기를. 그리고 언젠가 이 골목길이 사라지더라도, 오늘 저녁의 대화만큼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말이다.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작가 조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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