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이 글로벌 브랜드가 되기까지, 제스프리
1987년 늦가을, 뉴질랜드 테푸케의 안개 낀 새벽. 프랭크 베넷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비추며 키위나무 사이를 걸었다. 베이 오브 플렌티(Bay of Plenty) 지역의 베테랑 키위 농부였던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제 은행에서 받은 통지서가 주머니 속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수확을 앞둔 키위들이 가지에 무겁게 달려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작년 수확기에 kg당 4달러하던 키위 가격이 이제는 1달러도 받기 힘들어졌다. 뉴질랜드 전역의 키위 농가들이 비슷한 처지였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농가의 91%가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23%의 고금리와 불리한 환율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또 밤새워 고민하셨군요." 이웃 농장주이자 지역 키위 생산자 협회 임원인 피터 버클리가 울타리 너머로 말을 걸었다. 그의 농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난달에는 인근의 세 농장이 경매에 넘어갔다.
"피터, 더 이상 개별 농가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아." 프랭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해. 뉴질랜드 키위 산업 전체의 변화가 필요해."
이 대화는 후에 뉴질랜드 키위프루트 마케팅 보드(New Zealand Kiwifruit Marketing Board) 설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1988년, 전체 농가의 84%가 찬성한 단일 마케팅 시스템(Single-desk Marketing System)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어난 혁신적인 협력의 결실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품질 관리 시스템의 혁신이었다. 제스프리는 '키위스타트(KiwiStart)'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품질 기준을 수립했다. 이는 단순한 규정이 아닌,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종합적인 품질 관리 시스템이었다.
1997년, 제스프리는 혁신적인 도전을 시작했다. 키위 과일은 계절성이 강한 작물이었고, 이는 시장 확장의 큰 제약이었다. 제스프리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2개월 공급 시스템(12-month supply system)'을 구상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북반구 국가들과의 전략적 제휴였다. 1999년, 제스프리는 이탈리아 키위 생산자 연합과 첫 번째 협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성 기후로 키위 재배에 적합했고, 무엇보다 뉴질랜드와 정반대의 수확 시기를 가지고 있었다.
제스프리는 이탈리아 농가들에게 자사의 품종과 재배 기술을 제공했다. 대신 이탈리아 농가들은 제스프리의 엄격한 품질 기준을 준수해야 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이 아닌, 품질 관리 시스템 전체의 수출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이 모델은 일본과 한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일본의 에히메 현과 한국의 제주도는 키위 재배에 이상적인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제스프리는 각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재배 매뉴얼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한 특별한 재배 기술이 필요했다.
이러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2005년, 제스프리는 처음으로 연중 안정적인 키위 공급을 실현했다. 이는 시장 확대로 이어졌다. 연중 공급이 가능해지면서 대형 유통업체들과의 장기 계약이 가능해진 것이다.
2010년 11월 5일, 뉴질랜드 테푸케 지역. 제스프리의 정기 농장 점검 중이던 재배관리자들이 심각한 이상을 발견했다. 키위나무의 잎에 갈색 반점이 퍼져있었고, 일부 줄기에서는 붉은 수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는 세계 키위 산업을 위협하던 세균성 질환 Psa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제스프리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식물식품연구소(Plant & Food Research)와 함께 긴급 대응팀을 구성했다. 첫 단계는 정확한 진단이었다. 연구팀은 감염된 샘플을 채취하여 유전체 분석을 시작했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였다. Psa가 뉴질랜드에 상륙한 것이 확인되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이 세균은 이미 이탈리아에서 키위 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전력이 있었다. 제스프리는 다각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했다. 첫째,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엄격한 방역 체계 구축. 둘째, Psa 내성 품종 개발을 위한 연구. 셋째, 농가 지원을 위한 재정적 대책 마련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연구 분야였다. 식물식품연구소는 제스프리가 보유한 수천 개의 키위 품종을 대상으로 Psa 저항성 테스트를 시작했다. 이 과정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진행되었다. 연구진은 각 품종의 반응을 면밀히 관찰하고 데이터를 수집했다.
마침내 2015년, 획기적인 성과가 나왔다. 'Gold3' 품종이 Psa에 대한 강한 저항성을 보인 것이다. 이 품종은 'SunGold'라는 이름으로 상업화되어 제스프리의 새로운 주력 상품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수치로도 입증되었다. 2016/17년, 제스프리의 키위 수출액은 23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Psa 발병 이전보다 20% 증가한 수치였다. 제스프리의 위기 대응은 과학적 혁신과 산업 전체의 협력이 만들어낸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2017년 이 프로젝트를 이끈 연구팀이 뉴질랜드 총리 과학상을 수상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사례는 체계적인 연구 개발과 산업 전체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제스프리는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2024년, 제스프리는 창립 이래 가장 큰 도전에 직면했다. 바로 기후변화로 인한 재배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지속가능성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스프리는 이러한 복합적인 도전에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제스프리의 환경 대응 청사진은 2022년에 발표된 '2030 탄소중립 로드맵'에 명확히 담겨 있다. 이 계획은 재배부터 유통 전 과정의 탄소 배출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테푸케 지역 시범 농장에서는 토양 탄소 격리 기술을 성공적으로 적용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여기에 기술 혁신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023년에 시작된 '스마트 오차드' 프로젝트는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해 농장 관리를 획기적으로 효율화한다. 이 시스템은 토양 상태, 기후 조건, 나무 건강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최적의 재배 조건을 제시한다. 아울러, 2024년부터는 생분해성 포장재 도입을 확대하며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과일 신선도를 유지하는 친환경적 대안을 마련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과 농법이 효과적으로 현장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농부들의 풍부한 경험과 협조가 불가역적이다. 제스프리는 농부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1987년 위기 속에서 탄생했던 제스프리의 혁신 DNA는 여전히 강력하다.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시대적 도전 앞에서, 제스프리는 다시 한번 협력과 기술 혁신의 힘을 보여주며 현대 농업이 직면한 과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해답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