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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Dec 29. 2018

열일곱이나 스물일곱이나, 그냥 똑같네

26.9살을 보내며

은근히 무딘 구석이 있는 성격 탓일까, 그동안 여러 번의 새해를 맞이하면서도 딱히 큰 감흥을 느껴 본 적은 없다. 남들 다 만든다는 새해 목표도 세워 본 적이 없고, '이번 한 해는 정말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본 적도 없다. 그냥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지 뭐...' 따위의 미적지근한 생각뿐이었다. 해가 바뀐다고 인생에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하지만 누군가가 "그럼 올해도 그런 기분이야?" 하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뱉을 것이다. 오히려 요즘은 좀 들떠 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이상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내 나이가 이제 '스물일곱'이 된다는 것 때문에 그렇다.


스물일곱.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를 참 좋아했다. 사촌 동생과 인형 놀이를 할 때도 내 머릿속 인형의 나이는 항상 스물일곱이었고,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도 주인공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대부분 스물일곱, 또는 그 언저리의 나이였다.

27이라는 숫자에 왜 그리 로망을 가졌는지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린 눈에는 스물여섯이 2% 부족해 보이고, 스물여덟이 2% 과해 보였나 보다. 그래서 스물일곱은 더더욱 '완벽한 나이'였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그땐 내가 자라 스물일곱이 된다면 나름대로 똑 부러지고 능력 있는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생각건대, 그런 '어른'은 아마 평생을 살아도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얼마 전 대학 동기들이 모인 카톡방에서 수다를 떨던 중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A : 그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요즘은 나이에 0.8을 곱해야 진짜 나이라잖아.

B :

27 * 0.8 = 21.6

B : 오... 조금 더 막살아도 되는 걸까?



나는 21이라는 숫자를 보며 농담을 던지는 친구에게 [ 0.8은 너무 양심 없다! 0.9로 합의 봅시다 ] 하고 받아쳤다. 곧장 이어질 말로 '그래도 스물한 살 때보단 지금이 좀 더...'까지 타자를 쳤는데, 이상하게 그 뒤에 나올 말을 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작성하던 메시지를 모두 지워 버렸다.

지금이 좀 더 '어른스럽지 않냐', '철들지 않았냐' 등등 갖다 붙일 말이야 많았지만, 생각해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때에 비해 딱히 어른스러워지지도, 철들지도 않았으니. 시간은 5년이나 흘렀는데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는 졸업을 앞둔 선배들을 보며 굉장히 똑똑하고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졸업생이 되어 보니 전공 지식만 손톱만큼 늘었을 뿐, 그 외에는 신입생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초중고, 대학 4년에 휴학 1년까지, 총 17년을 학생으로 살았던 때에도 직장인들을 보면 나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제 몸 하나 거뜬히 책임질 수 있는 어른 같았으니. 하지만 막상 직장인이 된 지금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싶다. 그저 돈 걱정이 조금 더 늘었다는 것 정도?


열일곱과 서른둘이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 같아
아파하고 꿈을 꾸고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거라고
                   - 「아이러니」 - 뜨거운 감자


생각해 보면 참 '어쩌다 보니 인생'이었다. 어쩌다 보니 어제가 지나갔고, 또 어쩌다 보니 오늘을 살고 있다. 또 어쩌다 보니 내일을 맞이할 테고, 그렇게 무의미한 날이 쌓여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날들이 완성될 터였다.

아마 내년도 그렇겠지. '열일곱이나 스물일곱이나, 그냥 똑같네!' 하며.


다만 바라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어릴 적부터 스물일곱의 나이를 동경했던 만큼 어영부영 흘려보내는 한 해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해가 끝나갈 즈음에는 "이번 한 해, 그래도 참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 기꺼이 시간을 내어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에게도 좋은 한 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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