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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Jun 30. 2019

찔찔이 편집자의 일기

나는 사실 찔찔이다. 툭하면 힝 하고 울 수 있는 울보 찔찔이다. 남들은 신난다고 하는 노래를 들으며 슬프다고 찔찔 짠 적도 꽤 많고, 고작 20초 남짓한 광고를 보다가도 카피 한 줄에 또 코끝이 시큰해져 눈물을 짜기도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언젠가 영화 <라라랜드>를 보러 갔을 때다. 남들 다 울었다는 마지막 장면도 아니고, 도로 위에서 활기차게 춤추고 노래하는 오프닝 씬을 보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냥 색감이 너무 예쁘고 음악이 좋아서, 그게 너무 감동적이어서... 아마 누가 보면 사연 있는 여자가 혼자 영화관 와서 핑계 대고 우는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주 어렸을 때보단 눈물샘이 많이 무뎌진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다른 '어른'들에 비하면 눈물이 조금 많은 편이다.




이런 찔찔이는 운 좋게도 감성 에세이에 주력하는 작은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일하다가 종종 눈물을 찍어내는 날이 있다.

내 빈약한 눈물샘을 가장 많이 건드리는 것은 다름 아닌 원고다. 차라리 혼이 나서 우는 거라면 납득이라도 되지, 출간 준비하며 원고를 보다가 울컥 핑 도는 눈물을 참는 것이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교정 교열을 보다가 갑자기 혼자 눈물 찍어내는 모습이라니...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다. 수십 번 반복해 읽었던 원고여도 어느 순간 문장 하나가 콱 가슴에 박혀 눈물을 찔끔 흘리게 한다.


물론 출간을 진행한 원고의 절반 이상은 한 번씩 울컥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럴 때마다 동네방네 "이런 글이 있어요!" 하고 알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좋은 문장이 있다고, 괜찮은 글이니 꼭 읽어 보라고.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좋은 원고라고 해서 무조건 잘나가는 책이 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출판사와 세 번째 책을 준비 중인 작가님이 있다.

첫 번째 책은 출판사에서 먼저 '반응이 좋을 만한' 콘텐츠로 기획하여 방향을 잡았다. 표지까지도 예쁘게 잘 뽑힌 그 책은 출간 이후 생각보다 선방하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출간한 두 번째 책은 작가님이 먼저 작성하여 보여 준 원고였다. 출판사에서 제안했던 글감이 아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은 평범한 에세이였다. 아주 간략히 말하자면 우울증을 앓았던 날의 이야기로부터 그것을 극복하기까지의 이야기였다. 이때 원고를 읽으며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치솟는 눈물을 참느라 고생깨나 했던 기억이 있다. 교정 교열을 하는 내내 첫 책보다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비교적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고 말았다. 결국 세 번째 책은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작가님이 먼저 '첫 번째 책처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주어서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방향을 잡고 준비 중이다.


투고 원고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얼마 전 받았던 투고 원고는 글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글에 담긴 진실성이 절절히 녹아 있었다. 한 꼭지를 읽을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서 꼭 이 원고를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토서를 작성한 후 실장님과 대표님께 나름대로 의견을 열심히 피력했으나, 결국은 출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글이 좋은 것은 인정하나 그 외 마음에 걸리는 요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자세히 말하긴 어려워 여기까지만 말할 수밖에 없다.

투고 원고는 특히나 깐깐한 기준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적절한지, 유행이 지난 주제는 아닌지, 해당 분야의 시장 흐름, 출간 후 홍보, 작가와의 소통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상호간의 태도, 의견차이 등 '글만 좋아서는' 출간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도 많다.


이렇듯 찔찔이의 눈물샘은 성공적으로 공격하였으나 잘 풀리지 않은 원고가 너무 많다. 글이 좋다고 해서 모두 출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글이 좋다고 해서 성공적인 판매지수를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게 슬프다.

언젠가 3년, 5년, 10년차 경력을 가진 편집자가 되면 이런 일에도 무뎌지게 될까. '어쩔 수 없지. 글만 좋다고 책이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 하면서.


어쨌든 아직 눈물이 많이 남은 찔찔이 편집자는 내일도 출근해서 담당 원고를 읽을 것이다. 사실은 이미 한 번 울컥한 적이 있는 원고이니, 또 똑같이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진 채로 읽게 되겠지. 부디 좋은 글들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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