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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Dec 23. 2019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결국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한 기나긴 변명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입사 초반, 경력 3년을 채워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로 이직하겠다던 당당한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한 달 만에 빠져 버린 6kg의 살, 별다른 이유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터뜨렸던 울음, 심리 상담이라도 받아 볼까 밤마다 헤매었던 검색 기록의 흔적만을 남긴 채였다.


최근 한두 달 사이 알게 된 건 내가 생각보다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분명 그렇게 좋아하던 날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책이라는 존재는 부담감 그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숙제를 하듯, 꼭 해야 하는 업무를 하듯 주말마다 기계적으로 서점에 찾아가는 발걸음에는 설렘 대신 의무감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달 전,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한 투고 원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청년이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엮은 에세이였다. 필력이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의 삶이, 애환이 녹아 있는 원고였다. 원고를 검토하는 내내 눈물을 삼켰던 나는 꼭 이분과 출간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외부적인 요인으로 출간 제의까지 가지는 못했다.

"정말 괜찮은 원고였는데... 원고를 보다 보면 그게 너무 아쉬워. 좋은 글이 다 책이 될 순 없다는 거..."

그다지 무거운 분위기도 아니었고 심각하게 꺼낸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울컥 눈물이 솟았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러운 눈물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눈가를 꾹꾹 누르던 그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그 원고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그래도 나는 이 일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돌이켜 보면 분명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원고를 읽다가 벅차서 눈물이 났던 순간, 좋은 글이지만 외부적인 요인으로 계약하지 못한 원고를 생각하다가 울컥했던 순간, 내가 보낸 원고 피드백을 작가님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다던 소식에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랐던 그런 순간들.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책을 좋아했던 마음이, 지금 이렇게 되었다는 이유로 전부 가짜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표님은 일이 많다는 소리를 아주 싫어했다. 요새 무엇이 힘드냐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요즘 일이 많다"는 대답을 하면 차가운 일갈이 돌아왔다. 말 같은 소리를 해라, 누가 들으면 책이 한 달에 두세 권은 나오는 줄 알겠다, 편집자가 둘이면 달에 책이 두 권 나오는 게 맞는 거다.

기획과 편집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야 편집자 한 명이 달에 한 권의 책을 낼 수 있겠지만 우리는 팀이라곤 편집부가 다인, 그래서 편집자가 A부터 Z까지 직접적으로 손을 안 대는 부분이 없는 작은 회사였다. 하루종일 상세 페이지, 서점용 카드뉴스, SNS용 홍보 이미지, 포스트용 이미지, POP 이미지를 제작하다가 정작 원고는 손도 못 대는 날이 적지 않았다.

"오늘은 하루종일 디자인 툴만 만지다가 끝났네요."

"나중에 디자인 쪽으로 이직해도 될 것 같아요. 경력으로 쳐 줄 것 같은데."

나를 포함해 고작 둘뿐인 직원들 사이에는 자조와 웃음이 섞인 대화가 생각보다 자주 오갔다. 매일 이르면 7시, 늦으면 9시 가까이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그렇게 해도 일이 줄지를 않아 매 주말마다 집에서 일을 했어도 들려오는 말은 '고생한다, 힘든 거 알지만 수고해 주길 바란다' 대신 '일이 뭐가 많느냐'는 차가운 훈계뿐이었다.


대리님보다 집이 더 먼 나는 비교적 조금씩 더 이른 퇴근을 했다. 그래봐야 7시, 8시가 기본적인 퇴근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피를 잘 뽑지 못했다는 이유로 "퇴근 시간이 중요한 건 아는데, A 대리처럼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부담감은 네가 더 느껴야 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전날에도 8시 퇴근을 했었다. 아무런 수당이나 대가 없이, 바라는 것도 없이 그저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연차 휴가도 없는 1년 7개월 동안 엄마의 수술날 하루를 빼면 단 하루도 결근 없이 일을 했고,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때론 아무 대가가 없더라도 불만 없이 주말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오는 건 그런 말뿐이었다. 이렇게 일해 봤자 윗분들 눈에는 내가 노력하지 않는, 퇴근 시간을 더 중요시 여기는, 열정이 없는 직원으로 보이고 있구나. 일이 많은 것보다는 이렇게 일을 해도 알아 주지 않는다는 서러움, 너에겐 20대의 열정이 부족하다는 말, 무능력하면 능력을 채울 뭐라도 하라는 훈계가 더 아프고 힘들었다. 이렇게 일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결국 모든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수많은 걱정이 나를 둘러쌌지만 이미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근 한 달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밥을 먹으면 구역질이 나서 하루 내내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병원에서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온 날 오후에는 장염까지 나를 찾아왔다. 겨우 위염과 장염이 나아갈 무렵, 이번에는 혈뇨인지 부정출혈인지 모를 피를 보고야 말았다. 그래도 2년 경력은 채우고 싶다는 마음은 몸이 상해가자 모두 부스러졌다.

12월 중순의 월요일, 1월까지만 일하겠다는 퇴사 의사를 밝혔다.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당장 퇴사해 버리면 혼자 남을 대리님만 피를 볼 테니 후임을 구할 시간을 넉넉히 잡아 밝힌 의사였다. 하지만 항상 '일이 많지 않다'는 말을 하셨던 대표님은 정말 나와 생각이 달랐는지, 수요일즈음 나를 불러 이번 주까지만 일하고 정리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근로자가 퇴사 의사를 밝혔어도 30일 전에 나가라고 하면 부당 해고인데...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았고, 나 역시도 그냥 빨리 정리하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퇴사 의사를 밝힌 지 5일 만에 후임도 없이 마지막 퇴근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구인 공고는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 출근날의 새벽 달. 당분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곧 스물여덟을 목전에 둔 채로 불투명한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만큼은 정말 잘 보내고 싶었는데...

언젠가는 여길 그만둔 걸 후회하게 될까. 잘은 모르겠으나 다행히 지난 선택을 곱씹으며 후회에 빠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출판사에 취업을 할지, 외국으로 홀랑 나가 버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새로운 무엇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당분간은 나를 좀 돌보고 싶다. 이런저런 이유는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망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죄책감을, 졸지에 틀어진 인생 계획 때문에 불안해진 마음을 도닥이면서.

당분간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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