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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Mar 02. 2020

뜻밖의 등단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다

아주 작고 들어본 적도 없는, 계절마다 한 편의 문예지를 내는 작은 곳에 응모했던 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원고가 당선되었다.


아주 가끔 이런 날이 있다. '뭔가를 좀 해볼까?' 하는 도전 의지가 불타오르는 날.

2월 초중순쯤이었나, 문득 어딘가에 글을 좀 보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창 시절 들락거렸던 엽서시 문학공모 사이트에 접속했다. (학창 시절엔 사이트를 '들락거렸을 뿐', 글 한 편 완성을 못 시켜서 응모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긴 글을 쓰는 건 너무 힘들다. 집중력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접속해 본 지 1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곳엔 여전히 수많은 공모전 공고가 걸려 있었다.


사실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접속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특별한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고 마감일도 길게 남지 않은 신인문학상 공고 하나를 골랐다. 새 글을 쓸 여력도 없었던 탓에 한두 달 전 혼자 끄적여 저장해 뒀던 수필 두 편을 정리해 곧장 응모했다.

그다지 큰 고민 없는 과정이었다. 항상 기대를 품고 시작했던 일은 십중팔구 실망을 낳을 뿐이었다. 어차피 세상엔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천지에 널렸고, 나는 글을 쓰고 싶다면서도 막상 글 쓰는 걸 귀찮아하는, 아주 웃긴 인간이기 때문에 기대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약 한 달이 지난 오늘,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여보세요, OOO 선생님 맞으세요?"

"네네. 맞는데요."

"XX문학입니다. 신인문학상 수필 부문에 선생님 작품이 당선되어 등단하셨어요."

"앗..."

무슨 정신으로 통화를 했는지도 모르게 전화를 끊은 뒤 방방 뛰며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약 5분간의 짧은 흥분. 그 뒤로 몰려온 것은 혼자만의 민망함이었다.

다시 돌아온 내 작은 방에는 읽지도 않은 책이 여러 권 흐트러져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던 영어  명문장 100선이 너울거리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나이 스물여덟에 직업도 없이 워홀을 가겠답시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렇다. 전화를 받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건 없었다. 어디 신춘문예쯤이나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나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나 역시도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할 수 없는데.

등단이 되면 기성 작가로 대우해 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대우만 받으면 뭐할까. 내 이름이 찍힌 책 한 권조차 없는 기성 작가... 참 웃기지 않나.


전화 후 받은 안내 문자


어쨌거나.

이렇게 작은 문예지에서는 작가들에게 "등단하고 싶으면 몇십만 원을 내라" 하는 곳도 있다던데, 다행히 그런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수필 부문에 원고가 몇 편이나 들어왔는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몇 편 되지 않는 원고 중에서도 겨우 턱걸이로 당선한 건지도 모르지만, 심사해 주신 분들도 내 글을 읽고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거겠지.


또 혹시 모른다. 언젠가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하게 된다면 'XX문학에 등단했다'는 멋쩍은 소개 한 줄에 조금 더 공들여 읽어 줄지도. 그러려면 우선 글 쓰는 걸 귀찮아하는 이 죽일 놈의 귀차니즘부터 해결해야겠지.


그냥 맘 놓고 즐거워하자.

달라지는 건 없다지만, 오늘의 작은 행복을 충분히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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