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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Apr 11. 2021

아빠의 자격증

아빠의 손톱 밑에는 언제나 까만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아빠는 화장품 브러시 공장을 운영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억이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까마득하게 오래전인 날에도 브러시 공장을 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몇십 년은 되었을 터다.

공장의 기계실은 소음이 너무 커 말 한마디 건네려면 크게 소리를 쳐야 했다. 그렇게 해도 겨우 들릴까 말까 할 정도의 굉음이 끊이지 않는 기계실, 아빠는 그곳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기계에 찧어 다치고, 구멍가게에서 사온 라면이나 김밥 한 줄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지만 아빠는 언제나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 없었다.

그리 살아온 아빠의 손톱 밑에는 언제나 까만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그 얼룩은 아무리 공들여 씻어내고 긁어내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도, 어제도, 지난주에도, 저번 달에도, 작년에도, 그리고 십수 년 전에도, 아빠의 손톱 밑 기름때는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지워질 틈조차 있지 않았다. 나는 종종 퇴근길에 손에 묻은 빨간 플러스펜 잉크를 보고 '오늘도 열심히 했다'라고 뿌듯함을 느끼지만, 아빠의 손톱 밑 기름때는 그런 내 하루 치 보람에 비하지 못할 수십 년의 세월과 책임의 무게였을 것이다.


그랬던 아빠의 공장은 가면 갈수록 사정이 어려워졌다. 언제든 마냥 풍족하기만 하던 때는 없었으나, 근래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코로나가 가져온 또 다른 악재였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공들여 화장할 필요도 없었고, 아빠의 화장품 브러시 공장도 직격타를 맞게 된 것이다.

장기화한 코로나에 아빠는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공주 땅에 컨테이너 하나를 놓고 작은 밭을 가꾸며, 종종 그곳에서 키운 상추 따위의 채소를 가져다주던 아빠는 점점 더 공주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항상 공장 기계실에 있던 아빠였지만 더 이상 마땅한 일도 없는 공장에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테다.


결국 아빠는 오랫동안 같이 일해온 아저씨에게 공장을 넘겨주다시피 하고는 평생 관련도 없던 굴삭기운전기능사 자격증에 뛰어들었다. 나는 고작 3년을 출판사에서 일하고도 이제 이 일이 아니면 무얼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아빠는 평생 일해온 공장을 뒤로하고 새로운 길에 뛰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아빠에게 딸린 수많은 책임을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굴삭기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험을 본다던 소식을 들었을 땐 조금 갑작스러웠다. 요즘 공장이 정말 힘들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굴삭기 운전이 험한 일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필기에 몇 차례 떨어졌다면서도 계속 재시험을 보고, 실기에서 아깝게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너털웃음 지으며 풀어놓을 때도 평생 업 대신 다른 일에 도전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한편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평소처럼 출근해 아침 업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아빠와 언니와 내가 있던 조용한 카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국가기술자격증―굴삭기운전기능사.

사진관에서 제대로 찍은 증명사진도 아닌, 어디 벽 앞에 서서 핸드폰으로 찍은 듯한 아빠의 사진이 박힌 자격증. 아깝게 실기에 떨어졌다던 아빠가 결국 자격증 취득에 성공한 것이다. 조용한 사무실 한편에서 아빠의 자격증을 보고 있자니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자격증 하나로 당장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올 때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쉽게 도전하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청년들의 용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선택이었을 테다.


여전히 아빠는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다. 새로 얻은 자격증 하나를 손에 쥐었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괜찮을 것이다. 아빠가 성취해낸 것은 겨우 자격증 한 장이 아니니까. 그 자격증 뒤에는 새로운 도전 앞에 움츠러드는 아버지 세대의 두려움을 뛰어넘는 삶의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겨우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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