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그리고 D-7
수능 하루 전, 지진이 터졌다.
수능 하루 전 오늘, 포항에서 진도 5.5의 지진이 일어났다.
왜였을까 매년 내일 같지 않았던 수능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건.
수험생들에게 수능이란 어쩌면 인생을 뒤흔드는 지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저 내가 깜짝 놀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조금 전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는 초유의 결정이 발표되었다. 울트론이 군단을 이끌고 여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헐크가 날뛰어도 수능은 반드시 치러질 거 같았는데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 거 같다. 물론 일주일 뒤에도 여전히 춥겠지만.
나의 수능은 정확히 15년 전이었다.
수능 귀신이라도 있는지 기막히게 그날도 추웠다. 딱히 날씨 때문이 아니어도 초등 6년, 중-고등학교 6년, 12년의 세월이 단 하루로 점수 매겨지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또한 수험생 모두가 그 틀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오늘까지도 불행한 일이다. 단 하루에 내 남은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망언은 누가 했을까. 차라리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필시 누군가에겐 기적이, 누군가에겐 안도가, 누군가에겐 절망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 글이 절망할지도 모를 지금의 수험생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수능은 고3 수험생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한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은 항상 객관적 사실보다 참혹한 것이어서 수험생에겐 지극히 사실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수능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을 심어준 이도 없다. 꿈이 자라날 자리에 학생들은 책으로 콘크리트를 깔아야만 했다. 대학을 가야만 꿈을 꿀 수 있는 현실이라니 잔인하다. 곧 성인이 되는 수험생들이 그 무엇도 꿈꾸지 못한 채 대입이란 벼랑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니까.
아니 어쩌면 이건 처음부터 '꿈'같은 달콤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수험생 개개인은 부모의 '꿈' 그 자체로 살아왔고 어느새 '부모의 꿈'을 위해 살아왔으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지만 과연 '좋은 성적'이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이었나?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현관문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실망감이 먹구름처럼 부모님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걸 상상하니 그토록 괴로운 것일지 모르겠다. 성적표 하나에 표정이 바뀌었던 부모님의 얼굴들, 집안 분위기들. 집안의 행복지수는 결국 내 성적에서 비롯되었던 셈이니까. (적어도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왜 나는 좀 더 공부하지 않았을까. 게임을 줄였어야 했는데. 왜 나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을까. 그게 최고의 효도였는데. 아직 시험장에 들어서지도 않은 수험생의 어깨를 자책과 불안이 벌써부터 짓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험장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마음속에 작은 '불효자'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책과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어떤 말이든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진짜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시험공부'라는 표현이 옳다. 하지만 학생들은 처음부터 '시험공부'를 거절할 명분도 권한도 없었다. 원해서 '공부'한 학생이 몇이나 될까.
사는 동안 거의 쓸모없는 지식과 정보를 외우기만을 강요하는 잘못된 교육은 여전하다. 아니 더욱 조여졌고 굳어졌다. 그런 관점에서 '수능'은 한 가지 잣대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제도일 뿐 '수학'에 따른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으로서 역할에는 의문이 든다. 수능은 책 안의 것만 다룰 뿐 책 밖의 어떤 것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의 시험공부가 즐거운 사람은 언제나 소수라는 것을 꿰뚫어 본 누군가가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수능'을 망쳤다고 인생이 망가진 것은 조금도 아니다.
아닌 말로 미련이 남는다면 재도전을 하면 그만이다. 좋은 대학에 간 친구를 마냥 부러워할 것도 없다. 대학은 좀 더 불편한 방식의 지식과 교양을 습득하기 위한 장소이지 맘먹은 대로 모든 것을 이뤄주는 마법학교 같은 곳이 절대 아니니까.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이성친구를 사귄 적 없던 사람이라면, 대학가서도 애인은 생기지 않을 확률이 높으며, 학교는 지각해도 끼니는 제때 꼭 챙기는 사람이라면 수능이 망해도 입맛은 여전할 것이다. 예컨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스스로 변하기 전까진.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
수능, 나는 그 이후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시험을 잘 쳐서 기분이 붕 떠있건, 망쳐서 기분이 축 처져있건, 공통적으로 수험생들은 당분간 "자유"를 허락받는다. 한동안 부모 입에서 '공부'하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의 침묵일 뿐 앞으로 무얼 할지 정하지 않으면 또다시 '공부'에 등 떠밀릴 확률이 매우 높다. 아마 또다시 '공부'에 등 떠밀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진짜 중요한 건 수능 이후의 시간이다.
갑자기 찾아온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12년 아니 18년의 시간을 부모의 보호자로 학생으로 매여 살았다. 수능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지만 동시에 그 뒤에 꿈꿔왔던 달콤한 자유시간을 떠올려 본적은 셀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나만 떠올려라. 아마 남학생들은 첫 번째로 '배틀그라운드'를 떠올릴게 거의 확실하지만 몇몇은 조금 다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서 의외로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기 친절한 몇 가지 예시가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남학교, 여학교의 존재가 앗아간 건 두발의 자유에서 그치지 않고 청소년을 '연애 고자'로 만들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연애능력은 생존 필수 기술이며, 공감능력과 더불어 대화기술의 극대화등을 제공한다. 대학 가서 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다 컸다는 망상에 빠진 10대의 착각을 깨부수어주며, 운이 좋다면 한 껍질 벗고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계기도 얻을 수 있다. 혼자가 부담스럽다면 친구와 함께해도 좋다.(친구를 잃을 수 있는 리스크가..)
의식주중에 당장 가능하며, 삶을 쉽게 풍요롭게 하는 '요리'는 일상의 마법이다. 그리고 요리를 잘 하는 남자는 연애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무슨 짓을 해도 원빈 정우성은 못 이기지만, 그들과 경쟁할 일은 없다.)
내가 누구인가는 패션에서 드러난다. 뇌섹남은 뇌만 섹시해서 생긴 용어가 아니다. 섹시함에는 반드시 패션이 동반한다. 섹시해지려는 노력은 가장 원초적인 '성인'이 되는 방법이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조도 좋다. 수능 직후 수험생만큼 흥청망청 살아볼 수 있는 시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남자의 경우는 군 제대 후 한 번쯤, 여자의 경우는 그 조차도 없다.) 만약 친구들과 '배틀그라운드'를 함께 하며 추억을 쌓겠다고 한다면 그도 좋다. 어차피 우리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걸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어있으니까.
중요한 건 어떤 형식으로든 이토록 자유스러운 순간은 일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