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유 Sep 15. 2022

부모와 자식관계로 아파하는 당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사회, 문화적인 통념보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이에요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불특정다수에게 내 이야기를 공개하는, 온라인에 글을 올린다는 쉽고 단순한 행위가 굉장한 힐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곳, 브런치에서 깨달았다.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앤 유?'처럼 정해진 안부를 묻고 또 정해진 대답을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기에 누군가에게 나의 아프고 속상하고 힘든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필요이상의 용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나약한 면을 드러낼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가진 문제들에 더이상 수동적으로 파묻히고만 있지는 않겠다, 라는 결단의 시작이라 굳게 믿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에 온 나의 문화적 정체성은 한국 반, 북미 반, 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아주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내 안에 다른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릴 때 교육과 경험은 평생 간다고, 한국에서 받은 사상과 통념들은 나의 뿌리가 되어 진하게 남아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장유유서', '부모님의 은혜는 재량할 수 없이 크며 자식이면 무조건 마땅히 효도를 해야한다'라는 사상이 내 가치체계의 밑바닥에 차곡차곡 깔려있어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으면 무조건 자녀 잘못,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관념은 나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오해를 했던 것 같다.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폭력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부모는 동양문화권안에만 있다고 말이다. 



지난 5년간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이 선입견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험을 한 시간이었다. 감사하게도 내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여러 분들을 만났고 내 아픔과 부서진 조각들을 가감없이 드러냄을 통해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이해와 위로를 받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눈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지역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빅토리안시대 사고방식을 지금도 철저하게 따르는 부모님을 둔 영국출신 부부, 어릴 적 가난을 피해 캐나다로 왔지만 정신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는 부모님을 둔 포르투갈 출신 친구, 프랑스, 케냐, 일본, 이태리...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어떠한 나라던 문화던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겪게되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정말 많은 심리적인 문제가 바로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한국인이라서, 한국문화라서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을 아는 몇몇 친구가 내 글을 읽고 털어놓았다. 나도 그래. 사랑하는 엄마 때문에, 아빠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나는 내가 부족하고 못되어서 그런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지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힘들다면 반드시 그 화살의 날카로는 끝을 자기 자신으로만 돌리지는 말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부모님이 무조건 가해자이며 자식된 우리가 무조건 피해자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다만 부모-자식의 운명적으로 수직적일 수 밖에 관계에서 너무 손쉽게 우리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몰아붙이지는 말라는 이야기이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나에게서 상상력을 동원해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나라는 사람을 3자라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종종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통념과 관념의 오류에 빠져 허우적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부모-자식관계를 고민하며 깨달은 몇가지



지난 몇년간, 좋은 사람들과 나눈 꾸준한 이야기와 상담, 야금야금 계속 읽어왔던 관련 책자들, 그리고 내 스스로와의 심도있는 대화를 통해 배운것들이 있다. 여전히 거둬내야 할 것들, 채워야 할 것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배워온 것만을 앞으로도 잘 마음에 새긴다면 나는 내 스스로에게 더욱 멋지고 근사한 마음의 수문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당신도 나와 같이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종종 휘청인다면, 내가 배운 짧은 교훈들을 꼭 전해주고 싶다. 부디 따뜻한 울림과 위로로 다가갔으면 한다.




1. 부모님의 모든 1순위는 자식의 행복이 아니다


어릴 때 부터 우리는 모든 부모님의 1순위는 무조건 자식의 행복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이러한 문구는 마치 부모님이 하는 모든 행동과 결정은 자녀인 우리를 위한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부모님께 감사하고 순종해야한다는 감투를 쓴다. 


그러나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부모님이 우리에게 쏟아낸 여러가지 학대적 언어와 행동들. 그것들이 정말 자녀들의 행복을 1순위에 두어서 나온 것들인가? 우리의 생각과 현실이 다를 때, 특히 부모-자식관계에서 그러할 때 자녀들은 으례 부모님의 큰 마음을 다 이해하고 헤아리지 못한 우리 스스로를 탓하기 마련이다. 특히 순종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들일수록.


이제는 인정하자. 부모님은 우리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랄 수 있지만 그분들이 선택하는 모든 행동과 언어가 절대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1순위에 둔 것들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훨씬 많은 횟수로 본인 당신들이 편한 쪽으로 선택한 것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몇 년전에 나는 남동생과 제법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누가 들어도 남동생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굉장히 무례하고 잔인하게 굴고 있었음에도 우리 엄마는 그것에 대해 모른척하며 오히려 남동생의 안위를 우선으로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누나니까 너가 더 그릇이 넒어야한다, 라고 다그쳤다. 그때에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것이 그저 엄마가 옳고 그름을 떠나 본인이 편한 쪽으로 선택한 이기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안다. 흑과 백이 분명한 문제였음에도 내게 '누나니까'라는 덤터기를 씌우고 방임하는 것이 엄마에게는 가장 손쉬운 선택이었다.




2.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비록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이었지만.


나는 어릴때부터 부모님께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늘 학교일에 열심이었고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모범적으로 생활하면 생활할 수록 부모님은 '기준치'를 점점 더 위로 올렸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멈춰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하며 내가 칭찬을 받으면 내가 오만해지고 게을러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아빠는 내가 시험문제 하나라도 틀려서 오는 날에는 '너보다 못한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들, 게다가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도 많은데 너는 이것밖에 못하다니 수치스럽다, 너를 맘같아서는 고아원에 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망설임없이 퍼붓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당신의 첫째 자녀인 내가 늘 겸손하며 노력하며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길 바랬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가 원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 딸이 최고다', '네가 무엇이던 난 너를 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라는 말을 듣고 싶어 노력했지만 깨진 병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때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지금. 과거와 같이 강한 강도는 아니지만 엄마는 지금까지도 내게 감정적인 공감, 칭찬, 응원을 해주는데 인색하고 무척 서투른편이다. 유튜브에서 부모-자녀관련 강의를 보신 날이면 어색한 웃음으로 '딸아,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한마디를 휙 던지고 가시지만 그건 엄마가 근본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라 그때뿐인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두가지의 상충되는 문장에 진하게 선을 긋고 나니 오랜시간동안 머리속에서 빙빙 돌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나를 생각하거나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3.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켜야한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모든 것이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아기들은 무조건적으로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고자 한다. 이는 모든 아기들이 가지는 생존적 본능이다. 그렇기에 모든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한다. 어린 자녀들에게 있어 부모는 모든 세상이며 우주이다.


우리가 자라고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부모-자식 사이에 맺는 가장 첫번째 관계를 떠나 훨씬 많고 다양한 모습과 깊이를 가진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로부터 기대했던 것들을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부모로부터 거리두기가 때로는 필요할 수 있음 역시 체득한다.


성인이 된 나는, 나의 부모가 나를 낳아주고 어릴 때 키워줬다고 해서 무조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들이 나에게 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며 내게 피해를 줬을 경우 거리를 두고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 문화에서는 아무리 부모가 나빠도 자식은 무조건 부모를 따르고 도와줘야 한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는 매우 일차원적이며 얄팍한 통념이다. 내게 있어 가장 1순위는 내가 되어야한다. 아무리 부모라도 내게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정서적으로 칼을 들이댄다 하면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철저하게 방어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한다. 




4. 내 경험과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지 않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다시피 우리 아빠는 어릴 적, 나에게 언어적 폭력이 심한 편이었는데 엄마는 그런 상황에 있어 철저한 방관자였다. (이것은 첫번째 포인트인, 엄마가 가장 쉬운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러한 어릴 적 기억은 오랫동안 내게 심리적 트라우마로 남았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면 엄마는 오히려 나를 유약하고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게는 으례 한다고. 왜 너만 난리냐고. 다들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데 왜 너만 혼자 유독 날을 세우고 예민하게 구느냐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엄마는 아빠가 잘못했음을 인정했고 그 상황에서 본인은 방관하며 나에게 더욱 거센 비난을 퍼부은 당신도 옳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상황을 보고 겪더라도 각자의 입장과 선택에 따라 해석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름이 당연한 단순한 상황이더라도 현재 내가 어떻게 보고싶고 듣고싶고 이해하고 싶은지에 따라 부모님의 입장이 자녀의 입장하고는 크게 상반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경써야 할 부분은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유일한 부분은)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느냐다. 내가 아팠다고 하면 아팠던거다. 내가 아팠던 이유는 당연히 아팠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아팠던 것이지 절대 내가 유별나거나 이상해서가 아니다.  









나의 궁극적인 꿈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지만, 적어도 내가 맺는 여러 인간관계에서 무례하지 않고 배려깊은 사람으로 살고 싶고 그렇게 남고 싶다. 


우리의 인간관계의 척도와 온도는 나의 부모와 어떠한 관계를 가졌는가에 따라 밑그림이 그려진다. 좋은 부모님들만 있으면 좋으련만, 신문기사에 나기도 세기의 원수만도 못한 부모들이 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처럼 '평범'의 범주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본인들의 위치적 권위를 이용해 자녀들에게 정신적, 정서적 상처를 쉽게 내는 분들도 무척이나 많다. 


나라는 사람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쁜 것은 한시라도 빨리 튕겨내고 좋은 것들만을 품고 키우는 부지런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아하는 김창옥 교수님의 말을 빌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그리고 비틀거려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용쓰고 있는 나에게도 꾹꾹 진심으로 눌러쓴 메세지를 전한다.





"비록 지금 꽃이 없고 열매가 없어도 우리는 나무다.
 나는 반드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어내고 말테다." 





https://brunch.co.kr/@anthseid/8


https://brunch.co.kr/@anthseid/13 


작가의 이전글 엄마는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룸메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