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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유 Aug 24. 2021

타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마세요. 가족이라도.

'딸은 엄마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Boundaries'



올해 초, 코로나로 인해 사회 생활이 전반적으로 둔화되면서 쌓여가는 답답함에 블로그를 하나 오픈했었다. 즉흥적이었던 결정. 오랜 취미 생활인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고 당시 근래에 읽었던 책들 중 괜찮았던 것들을 책장에서 추려 간단한 리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


시간이 지나 글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블로그 방문자는 많지는 않을지언정 데이터가 생겨나면서 조금씩 애널리틱스도 찾아보게 되었다. 단연 궁금한 것은 내 블로그의 가장 인기 포스트. 찾아본 결과는 제법 놀라웠다. 예상과 달리 유명 클래식 문학 소설 혹은 자기계발서 리뷰가 아니었기 때문. 주로 영어원서를 읽고 리뷰하는 블로그에서 예외적으로 쓴 한국어책 리뷰,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내 블로그의 톡톡한 효자 포스팅을 담당했던 주인공.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감정쓰레기통이라는 단어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 


'감정쓰레기통'은 따져보면 우울증이나 가스라이팅같이 임상 의학용어가 아닌, 비교적 최근에 대중에 의해 직관적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지는 단어인 만큼 그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주관적인 해석이 분분할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본인의 괴로움과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그의 대화 상대가 되는 것을 감정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누군지는 몰라도 이 단어를 처음 발명(!)해 낸 사람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의 해석이라고 추측한다. 누군가의 바스러진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자체가 감정쓰레기통이라면 솔직한 감정의 교류가 잘못된 것이게? 


'쓰레기통'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크다. 감정쓰레기통이란 상대방의 상태와 감정, 독립적이고 주관적인 태도를 인정하지 않으며 무시하는 관계를 뜻한다는 것이 나의 간단한 정의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져놓고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것 처럼, 내가 던진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에 상대방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반응해야 하며 그것과 다른 모양의 반응은 인정하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 그것 말이다. 


  







저자 가야마 리카는 가족심리 전문의로써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 

수년의 상담 경험을 통해 접한 수많은 케이스들을 통해 저자는 이 짧은 책을 통해 여러 증상으로 나타나는 엄마와 딸의 갈등의 중심 문제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에 대한 본인의 조심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저자는 엄마와 딸, 모녀간의 갈등의 뿌리를 '기울어진 저울'에서 찾는다. 사실관계만을 놓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딸이 200% 옳은 쪽에 서있더라도 엄마는 "넌 그래도 내 딸이야", "나는 네 엄마야"라는 관계성의 우위에 호소해 구도를 완전히 뒤엎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다시 말해 엄마는 처음부터 딸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가 아닌 자신보다 훨씬 아래쪽에 놓고 강압, 혹은 동정을 통해서 휘두르려고 하기 때문에 딸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수더라는 것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의 꿈을 태연히 짓밟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게 다 널 위해서야'라고 고개를 숙이다가도, 눈물을 훔치면서 '어제 먹다 남은 돈가스가 있는데, 데워서 먹을래?'라고 순식간에 화제를 옮길 수 있는, 매우 억세고 거침없는 존재다.


흥미로운 점은, 엄마의 이러한 '기울어진 저울'은 딸과 엄마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아들이라면 그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성(gender, 性)을 가진 아들을 향해서는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인식 위에 신기해하면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더해져 조심스럽게 대하는 엄마들을 저자는 목격할 수 있었다. 저자는 엄마로 인해 우울증이 생긴 아들의 케이스보다 딸의 케이스가 월등히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수치의 원인을 이러한 엄마의 이중성에서 유추한다.








조금씩 다른 상황에 획일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란 아마도 불가능한 일. 

그러나 자신이 처한 갈등이 엄마의 일방적인 차별과 조종하려는 의도에서 온다고 판단될 경우, 저자는 따뜻하지만 확고한 그녀의 조언을 전한다. 엄마에게 누구보다 훌륭한 딸이 되고 싶고 행복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죄책감은 '좋은 딸'이라면 누구나 갖는 필연적인 운명같은 감정이니 너무 아파하지는 말라고. 그리고 엄마를 배신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든다면 이는 주체적으로 행복한 나의 삶을 꾸려가기 위한 필요경비로 생각하라는 것.


모녀간의 갈등의 해결을 위해 건강한 관계의 경계선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설명하자면 상대가 내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하고 이를 명확하게 구별해 상대방에게 언어적, 비언어적 방법으로 알리는 것을 뜻한다. 관계의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를 존중하지 않고 넘어올 경우 이를 단순히 묵과하지 않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극단적인 경우, 인연을 끊는 것까지 연장될 수 있겠지. 










"기울어진 저울"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콕하고 와닿는다.

단순한 이 표현이 모녀 관계의 갈등을 포함, 우리가 겪는 수많은 인간관계의 갈등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다. 나를 불쾌하게 하게 스트레스를 주는 많은 관계가 이 기울어진 저울에서 오는 거다. 상대방은 나 자신과 같이 주체적인 감정과 사고,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서로가 존중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정말 수많은 문제거리들이 단번에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제법 유쾌하지 않은 일을 겪었다. 인생의 절반을 알고 지낸 친구와 연을 끊은 일이 그것이다. 반년이 넘게 이 친구는 나에게 거의 매일같이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당시 친구는 생활에 불편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치료만 받으면 단기간에 완치가 충분히 가능한 병을 진단받았는데 게다가 초기였는지라 의사가 인정할 정도로 회복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병으로 나에게 끊임없는 동정과 관심을 요구했다. 날씨, 연예인, 직장, 음식 등 그 어느 토픽을 꺼내도 결론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가여우니 너는 나에게 무조건 관심을 주고 우쭈쭈 해줘야해". 완치판정을 받은 후에도 언제 재발될 지 모르니 (의학적으로 재발의 가능성은 낮았으며 있다 하더라도 감기와 같은 불행의 요소) 자신은 평생을 늘 불안속에 살아야 하는 비참하고 가여운 존재라면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감정적 호소까지. 


감정은 전염된다. 물이 새는 천장과 같이 끊임없는 요구에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위험한 신호가 보인다는 진단을 받기도. 여행까지 같이 간 친한 친구라 끝까지 참으면서 8개월만에 딱 한마디 했었다. 지금의 힘든 일도 나중에 보면 결국엔 지나가는 바람일 뿐일테니 그것에 가려 현재의 기쁘고 행복한 일을 놓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결과는? 필터링 없는 원망과 적개심, 무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극명한 감정쓰레기통일 뿐이었다는 것. 


연락처를 지우고 잠시동안은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이었나'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에 수시로 떠올랐었다. 그러나 열 번 내게 물어도 열 번의 대답은 동일했다. 아프고 서럽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아무리 오래된 인연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남의 행복까지 불행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감정의 쓰레기통 취급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 아이는 나와의 관계에서 나를 대하는 데에 있어 잘못된 선택을 했고 나는 그 선택에 적절한 대처를 했다. 후회가 남는다면 단 하나, 내 마음이 아프기 전에 좀 더 빨리 대처하지 못한 것. 


서로에게 행복하고 유익한 관계를 위해서라면 '존중'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만약 이것이 어그러질 경우, 그리고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 적절히 반응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내 마음은 내가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또라이 질량 법칙"이라는 것이 있단다. 

조직/모임의 성격과 문화의 다름과 상관없이 어디든지 꼭 한명은 crazy한 사람이 있다고. 만약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되면 자신이 그 또라이일지도 모른다는 첨언과 함께.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인간관계를 넓히는 나이보다 깊게 만들어야 하는 나이가 되니 직설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같다는 생각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책중의 하나인 Boundaries: When to Say Yes, How to Say No to Take Control of Your Life (Written by Henry Cloud and John Townsend)는 기독교적인 색깔이 입혀지긴 했지만 전문 심리학자가 학문적인 관점에서 탄탄한 논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큼, 오랜 시간동안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요지를 아주 간략하고 거칠게 말하면 이거다. 건강하고 효과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가족들과 일 포함) 유연한 '바운더리'를 세워야 하는데 이는 철옹성이 아닌 열리는 문이 달린 게이트 같아야 한단다. 이 문을 통해 우리는 독성이 있는 관계는 밖으로 내보내고 나를 세워주고 일으키는 관계는 안으로 들여보낸다. 


우리 모두는 관계안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오래된 시간동안 발전된 관계일 수록 우리는 자연스레 더 큰 신뢰와 편안함을 갖고 좀 더 큰 기대 또한 가지게 된다.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아무리 시간이 깊은 관계일 지언정 오늘의 내가 그 관계를 어그러뜨린다면 어제의 그 모든 시간은 순식간에 한낱 신기루로 변해버릴 수 있는 것 또한 관계의 특징이다. 그래서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알게 모르게 내가 기울어뜨린 저울은 없는지 경계하며 말이다. 


아마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나이이지만 하나 배운게 있다면 인간관계란, 인연이란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제법 크다는 것.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제법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러 있기도 하고 오랫동안 같이 지낼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단칼에 잘린듯 정리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든다. 더불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나의 성장에 있어 나는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 








*이 글에 거론된 책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 가야마 리카 지음, 김경은 옮김 (2018)

Boundaries by Henry Cloud and John Townsend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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