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k', 'The Picture of Dorian Gray'
영화, 드라마,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선한 마음과 의도를 가진 '주인공'과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악당'을 골라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주인공은 주인공의 얼굴, 악당은 악당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클리셰가 건강하지 못한 선입견을 심어주고 창의성도 저하시킬 수 있다는 목소리에 최근에는 익살스러운 인상의 주인공, 약해보이는 모습을 가진 악당이 나오는 작품들도 종종 나오고 있는 추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역할에 맞는 생김새를 통해 보는 사람들에게 외모적인 설득력을 주는 큰 틀을 완벽하게 깨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듯해 보인다.
당신의 얼굴이 가진 형용사는 무엇입니까
소설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생김새를 표현하는 데 짧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곤 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가상의 인물을 마치 실존하는 인물처럼 상상하도록 도와주는데 이러한 섬세한 인물 묘사는 큰 도움이 된다. 작가가 특정 인물을 표현하는데 있어 엄선한 형용사들을 통해 그의 모습을 머리속에서 스케치를 하다 보면 왠지 그의 앞날까지 미리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예상 시나리오가 실제로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신선하고 짜릿한 반전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너무 큰 불협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조성해 스토리 자체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만 같은 위협을 주기도 하니, 인물들을 구상하고 설정하는 데 있어서 작가들의 고민은 참으로 치열하겠다 싶다.
영상물이나 책에서 인물들의 생김새와 그들의 캐릭터, 그리고 앞으로의 스토리의 진행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연관성과 영향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상에서는 얼마나 큰 유효성을 가지는지 궁금해졌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라는 교훈적인 메시지가 여러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모의 강력한 힘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라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충분한 주인공의 조건들을 갖추긴 했을까.
어떠한 형용사들이 나를 대변하고 있을까.
외모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이 까끌하게 느껴지면서도 자꾸만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게 됐다. 평생을 봐 온 만큼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구석구석 살펴보게 된다. 못난 부분이 더 크게 부각되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이정도면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 사이에서 추가 바쁘게 진자운동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건가 이 말이다.
당신의 얼굴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유명 저널리스트며 작가인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이 2005년 발간한 책 블링크(Blink: The Power of Thinking Without Thinking)에는 미국의 29대 대통령 Warren G. Harding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미국의 역대 최악의 대통령중 하나로 손꼽히는 하딩 전대통령.
심각한 여성편력과 줄줄이 이어지는 스캔들,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당당하게 불법적으로 제조된 위스키를 마시며 백악관 도서관에서 포커판을 벌인 것은 억지로 '개인적'인 도덕성에 관련된 문제라고 넘겨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호도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본업'만큼은 제대로 한다는 것을 바탕이 된 상황일 때에 가능한 일. (게다가 사실 이런 이분법이 통하는 케이스는 소수이지 않은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결국에는 같은 사람이기에 한 쪽 문제가 결국엔 다른 쪽으로도 터져나오는 일은 다반사인지라.) 하딩 전대통령의 정치성적표는 처참했기에 이러한 변호의 호사는 누릴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여러모로 자질이 부족했던 하딩이 국가공무원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글래드웰은 하딩이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작은 신문사의 기자에서부터 정치계에 화려하게 입문하는데까지 그의 뒤에서 서포터를 자처하며 큰 도움을 준 해리 도어티(Harry Daugherty)에게 집중한다. 잘나가는 변호사이자 로비스트로 오하이오 주의 정치계는 꽉 잡고 있었던 도어티는 하딩을 만난 순간 그의 외모에 빠져버린다. 커다랗고 단단한 체구와 굵은 까만 모발, 날카로우면서도 강단있어 보이는 눈빛과 구릿빛의 피부까지. 하딩의 출중한 외모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왕족에 비견되어 매스컴에 오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어티는 하딩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잘생긴 대통령감'으로 마음속에 점찍어놨다고 전해진다. 세계1차대전이 막 끝난 후의 불안정하고 뒤숭숭한 시대상은 카리스마 있고 강인한 리더를 원했다. 단단하고 큰 몸의 골격과 굵은 선을 가진 얼굴의 하딩은 이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대중을 설득하는데 있어 훌륭한 재료가 되었다. 그의 외모는 그의 말 한마디, 작은 성공 하나에도 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할 수 있었고 미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을 멋지게 이끌어 줄 잘생긴 새로운 리더의 탄생에 크게 환호했다고 전해진다. 비록 그 환호성은 오래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도리안 그레이, 그가 끝까지 나쁜 남자일 수 있었던 이유
사람의 외모가 가질 수 있는 무서우리만큼 큰 영향력을 이야기해보자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문학 작품이 있다. 탐미주의, 유미주의(estheticism)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시인,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다.
도리안 그레이는 빼어나게 출중한 외모로 화가인 바질(Basil Hallward)의 초상화 모델이 된다. 그레이의 초상화에 반하고 실물에 한번 더 반한 바질의 지인 헨리경(Lord Henry Wotton)은 적극적으로 그레이에게 접근, 화려한 언변으로 그레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와의 인연을 만든다. 고압적인 태도로 자신의 (삐뚤어진) 세계관을 순진한 어린 청년에 불과했던 그레이에게 집어넣고 그로 인해 그레이는 자신의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서 그의 영혼은 서서히 타락하게 된다는 대략적인 내용.
소설 후반부, 그레이의 진면목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져버린 장면이 서술된다. 시간을 거스르는 젊고 수려환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타락한 내면을 가진 그레이와는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떠돌게 된 것. 하지만 그의 외모의 힘은 대단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레이의 외모에 반해 그에게 접근했고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는 사이클이 꾸준하게 반복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실에서도 제법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에 소설에 나와있지 않은 좀 더 자세한 정황과 인물들의 심리를 어느정도는 유추해 볼 수 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딩을 대통력직까지 올려놓는데 큰 일조를 했던 그의 수려한 겉모습처럼 그레이의 빛나는 외모 그 자체가 강력한 설득력을 발현하지 않았을까.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들 안에는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내면 또한 아름다울 것', '저 사람이 혹평을 받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질투 때문',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울테니 내가 가서 친구가 되어야지' 등과 같은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내러티브가 차곡차곡 겹겹히 쌓였겠지. 백마디 말보다 예쁘고 멋진 사람이 짓는 표정 하나, 뱉은 한마디 말이 찰나의 순간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일은 꼭 누군가에게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일과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안에 평범한 얼굴을 하고 속속들이 심어져 있다.
환경을 통해 진입장벽 낮추기
외모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나 취향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 '어깨가 넓은 사람이 듬직하다', '눈이 위로 찢어진 사람은 얍삽하다',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믿을만하다'와 같은 종류의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내제되어 있는 기본값 페어링(말콤 글래드웰은 책에서 이를 priming이라고 소개했다)은 사실 얼마나 단순하고 불공평한가. 개개인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이러한 외모 관련 내러티브로 인해 우리 모두는 때때로 수혜자가 되기도,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벽을 어떻게하면 조금 낮출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말콤 글래드웰은 이러한 페어링을 깨부수는 불편한 환경에 자신을 자주 노출(expose)할 것을 권한다. '어, 저 사람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네?'라는 긍정적인 불편함을 주는 환경에 일부러 나를 더 많이 노출시키면 내 안에 있는 여러 유리벽들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얄팍한 선입견으로 정말 좋은 사람을 놓친다면 이는 두고 두고 뼈아픈 과오가 될 수 있으니 이를 방지할 수 있도록 미리 내 그릇을 넓혀놓는 것이다. 역시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예방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반대로 적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선 상대방의 선입견이 얼마나 단단하느냐에 따라 내 타고난 외모와 연결되는 형용사가 객관적인 사실과는 다른 위치에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음을 인정할 것. 옷을 깨끗하게 입는다는지 청결에 신경쓴다던지와 같은 상식과 매너에 포함되는, 그래서 충분히 쉽게 변화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편입견이 깨지는 데에는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너무 서둘러 '불공평하다', '차별이다'라고 징징대고 상대방을 비난하려 드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클 때가 많으니 주의. 시간은 나의 친구 - 차근 차근 내 진면목을 알아봐주고 그것에 따른 변화가 쫓아오는지 본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 연관성이 없는 억지 유리벽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상대방이라면 그는 좋은 사람을 놓치는 과오를 저지르는 중이니 손 탁탁 털고 깨끗하게 뒤돌아 서는 것이 좋겠다.
당신이 원하는 당신의 형용사는 무엇입니까
책상위에 백지와 펜 한자루만 놓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지고 싶은 내 인생의 형용사를 세가지만 꼽는다고 한다면 난 어떤 것들을 말하고 싶을까. 짧은 질문이지만 동반되는 무게는 대단해서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몇 개의 후보들안에서 망설이고 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풍미가 깊어지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것.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에 나오는 두번째 습관은 '끝을 염두에 두고 일을 시작하는 것(Begin with the end in mind)'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오르막이던 내리막이던 진흙길이던 포장도로이던,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계절이 아지랑이 가득한 봄이던 땡볕이 지독한 여름이던 혹은 이빨까지 덜덜 떨리던 겨울이던 이 모든 것은 결국엔 지나가는 것들이고 마지막에는 하나의 커다란 스토리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나의 결정은 사적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공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가만히 내 마음속에 둥둥 떠다니는 내러티브에 귀를 기울인다. 그 내러티브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앞에 또 하나의 벽을 놓고 있지는 않은지 최선을 다해서 면밀하게 살펴본다. 실수나 잘못을 아예 안하고 살면 얼마나 좋겠냐먄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므로 후회라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덜고 싶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얼굴이 따로 정해져있을 지언정 나에게 만큼은 주인공은 나 하나뿐이고 바꿀래야 바꿀 수도 없으니 좀 더 깊은 의미로 내 얼굴을 책임지는 삶을 살아내는 것, 결국엔 그것이 정답이겠지.
*이 글에 거론된 책들
Blink: The Power of Thinking Without Thinking by Malcolm Gladwell (2005)
The Picture of Dorian Gray by Oscar Wilde (1890)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by Stephen R. Covey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