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 있어 출판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왠지 로날드 사장은 앓던 이가 빠진 표정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그는 서점 순례를 하며 눈여겨봐 두었던 책들을 떠올렸다.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시원섭섭한 얼굴을 한 그의 손에 돈다발이 들려 있었다. 출판사를 정리하고 남은 돈이었다.
"이 돈이면 한동안 걱정 없겠군."
이제 로날드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에서 애서가 혹은 장서가로 불렸다.
그는 날이 갈수록 외출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회사를 정리하자 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없어졌다. 까탈스러운 작가를 만나 원고를 청탁하는 업무에서도 해방이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백 번도 넘는 손길이 가는 일에서도 놓여났다. 평가를 받는 출판인에서 평가를 하는 독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짜릿한 즐거움이었다.
물론 돈벌이가 끊겨 불안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달리했다.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검소하게 절약만 한다면 죽을 때까지 굶지는 않을거야.'
부자들이 들으면 비웃을 금액이었지만 로날드에게도 쪼개 쓸 노후 자금은 있었다.
그는 점점 집에 틀어박혀 책 읽기에만 몰두했다. 로날드가 나들이할 때란 희귀한 책을 구해 놓았으니 사러 오라는 책가게 주인의 전갈을 받을 때뿐이었다.
은둔 생활이 길어지자 종종 찾아와 주던 친구들의 발길이 차츰 끊어졌다. 결혼도 한 적 없고 자식도 가져 본 적 없는 로날드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둘레를 가득 메운 책뿐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독서가 로날드는 이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눠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지식을 나눠 줄 이유도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그는 점점 책 속에 파묻혀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사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사 모은 책들이 창문을 가려 로날드의 집안은 대낮에도 어두침침했다. 낮이든 밤이든 기름 램프를 켜놓고 책만 읽는 로날드는 마치 깎아놓은 돌조각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로날드 집 앞에 고급 승용차가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린 신사는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로날드 집 현관 앞에 섰다.
비서가 대신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응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비서가 힐끗 돌아보자 단정한 양복 차림의 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가 대답했다.
“문화부 장관님께서 로날드 선생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인터폰에서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해진 비서가 다시 초인종 단추를 누르려는데 현관문이 달칵하고 열렸다.
"실례합니다."
비서가 열린 문틈 사이로 인사를 흘려넣었지만 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남자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안 풍경을 본 비서의 눈과 입이 커다래졌다. 장관은 음, 소리와 함께 턱을 주억거렸다.
장관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부에서 문화부를 담당하고 있는 린튼이라고 합니다. 로날드 선생님께 부탁의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린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장관이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크게 말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안쪽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로날드입니다만, 문화부 장관님과는 용건이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