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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코니 Mar 11. 2022

잠들기 전에 읽는 백일야화 (百日夜話)

네 번째 밤 - 그림자 사서(3)




대답 소리에 용기를 얻은 장관이 다시 말했다.


“선생님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날드 씨를 국립 도서관 관장으로 모시고자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다시 안쪽 방에서 대답 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런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한 어투였다. 

장관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로날드 씨만큼 많은 책을 섭렵한 분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다방면의 책을 수집하고 읽으신 경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처럼 책에 대해 박학다식한 분이 관장 자리를 맡아주시지 않으면 누가 도서관을 이끌겠습니까?”


장관의 간곡한 설득이 거실 안을 꽉 채웠다. 


 “제가 책을 좋아하고 이끼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는 남들 앞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로날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젊은 비서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서지 못하신단 뜻이죠? 아니, 그것보다 우선 거실로 나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거절하신대도 얼굴은 비춰주셔야 예의 아니겠습니까.”


“이보게, 그만하게.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온 우리의 무례도 생각해야지.”


장관이 혈기왕성한 비서를 저지하는데 방에서 무언가 쓱 나타났다. 

두 사람은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다 헉, 하고 놀랐다. 

검은빛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듯 걸어 나오는 광경 때문이었다.

검은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사람 형체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제가 로날드입니다. 모처럼 방문하신 손님인데 이런 모습으로 응대를 하게 되어 무척 유감입니다.”


로날드는 이미 그림자만 남은, 그러니까 실루엣이 된 그림자 인간으로 변한 후였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점점 색깔을 잃어갔다. 만나는 사람도, 편지나 소식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이 어두운 집안에서 오로지 책에만 골몰하다 빛이 바래버린 것이었다. 


물론 스스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워낙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일어난 일이었다. 색을 잃어가는 동안 몸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출판사를 닫은 후, 로날드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게다가 집안에 있는 거울이란 거울은 몽땅 책들이 가린 지 오래였다. 


점점 회색으로 빛이 바래더니 어느 비 오는 날, 로날드는 그림자로 변했다. 

마침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으로 빗방울이 들이쳤다. 책을 읽던 로날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책들이 비에 젖기 전에 창문을 닫으려는 몸짓이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림자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스럽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이대로라면 외출할 일이 전혀 없겠구먼.” 


로날드의 사연을 듣던 비서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날드 씨 말씀대로 대외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성급한 젊은이가 포기하듯 웅얼거리는데 장관이 손을 들었다.


“잠깐! 로날드 씨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도서관장 자리는 다른 분께 맡기기로 하고 대신 사서 일을 맡아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장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책을 좋아해 두문불출하는 사람에게 도서관 서고처럼 행복한 곳도 없겠죠. 이렇게 집이 터져나가라 책을 사 모은다 해도 결국엔 한계에 부딪힐 겁니다. 물리적 한계와 금전적 한계. 그러니 이 좁은 집을 떠나 국립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 세계에서 모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으실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겁니다.”


로날드가 곰곰이 궁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계속)


     

가득 쌓인 책이 햇볕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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