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소음이 더 심해졌다. 더 잘 들린 걸까. 가끔 텅! 텅! 하는 큰소리를 내기도 했다. 봐달라고 야! 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일을 하긴 했다. 결혼한 지 15년을 바라보니까 얘(냉장고)도 15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일했다. 지금 사는 집에 온 지는 7년 정도 됐으니까 7년을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한 셈이다. 2년 전부터 이사계획을 세우면서 냉장고부터 바꾸고 싶었다. 신혼 혼수품 느낌이 아닌 요즘 가장 유행하는 최신 스타일의 냉장고를 사고 싶은 욕심에 냉장고의 사망(?)을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묵묵히 본인의 소임을 다하던 냉장고는 이사 2달을 남겨두고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엿먹이는 건가?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스친 생각.
이미 새 집에 들어갈 새 냉장고는 계약을 마친 상태. 2달 뒤에 새 집으로 이사 가면 새 녀석으로 갈아탈 수 있었는데 그 2달을 남겨두고 냉장고는 완전히 숨을 거뒀다. 숨을 거두기 하루 전, 사무실에 있는데 집에 있던 남편이 냉장고 불이 안 들어온다며 카톡이 왔다. 하지만 모터 소리는 난다며 이사 갈 때까지는 쓸 수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또 다음날 갑자기 냉장고가 안된다며 연락이 왔다. 냉장고를 앞으로 밀어 뒤에 있는 콘센트 선을 다시 뺐다 꽂아봤지만 전원도 안 들어오고 모터소리도 안 난다고 했다. 냉장고의 생존반응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같은 사무실에 있던 직원은 자기도 얼마 전에 냉장고 사망선고를 받았다며 냉장고 문을 최대한 열지 말라는 팁을 줬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앞두고 많은 정보를 주고받던 터였다. 냉장고 고장과 AS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수리비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고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본인도 곧 이사를 갈 것이라 몇 달만 견디고 새 집에 이사 가게 되면 깔끔하게 새 냉장고를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냉장고 말고도 김치 냉장고가 있어서 당분간은 그리 힘들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이사를 앞두고 있던 터라 김치 냉장고에 수년간 묵혀둔 김치를 정리하고 있던 참이어서 공간도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냉동실 맨 안쪽 어딘가에 화석(?)처럼 굳은 떡이나 음식들을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기도 했다! 기쁨이 몰려왔다. 나도 냉장고 미니멀 라이프를 실현할 날이 오는 건가!!
퇴근하는 내내 냉장고 정리하는 상상을 하며 차를 몰았다. 신나게 냉동실 음식을 버리는 상상을 했다. 텅텅 빈 냉장고를 상상하니 속이 후련했다. 명절이며 행사날 시댁을 방문하는 날이면 갖가지 반찬과 부식거리, 그동안 챙겨두었던 얼려둔 음식을 한가득 챙겨주셨던 어머님 생각이 났다. 아버님과 두 식구 살림이지만 냉장고 3대를 보유하신 어머님의 냉장고는 늘 꽉꽉 차 있었다. 얼려둔 데친 야채와 묵은쌀로 해둔 떡도 싸주셨다. 아들이 좋아하는 반찬과 일하는 며느리를 생각해서 챙겨둔 것도 있고 한창 먹을 나이인 손주들이 생각나서 싸놨던 것들도 챙겨주셨다. 게으르고 피곤한 며느리가 알뜰하게 챙기지 못해서 점점 뒤로 밀려난 음식들이 가끔 생각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가끔 마음이 내켜서 며칠 열심히 파먹어 봤지만 쌓인 음식 양만큼 따라잡진 못했다. 그런데 오늘 냉장고가 고장 났다는 합법적인(?) 핑계로 수년간 묵은 음식들을 처리할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