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사이 내 삶은 이전보다 쉬워졌다. 삶이 쉬워졌다니. 무슨 말일까. 이 물음에 답을 하자니 또 글자가 허공에서 날아다닐까 봐 전전긍긍한다. 오늘은 결코 너의 마음에 지지 않으리라. 컴퓨터 화면을 열었다 닫았다 그동안 수십 번을 하면서 2줄을 넘기지 못하고 화면은 닫혔다. 그리고 또 한참을 열지 못하기를 반복하며 3년 하고도 몇 달이 훌쩍 지났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였다. 젊고 더없이 푸른 날, 그러면서도 지지리도 지난했던 날이 지속되었던 오랜 시간 나는 글에 기대어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어 하루를 산다.
시간이라는 게 흩어지고 나면 부질없다. 아이의 키가 자라는 것처럼 시간은 쌓이면 애틋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쓰고 보니 이것은 사랑인가 보다) 삶을 큰 파이로 본다면 어제까지의 내 삶은 먼지 같은 하루였다. 먼지 같은 하루가 될까 봐 매 순간을 기억하고자 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녹색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는 고장 난 빨간불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횡단보도 앞에서 서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스치며 지나가는데 나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다. 블로그와 브런치, SNS를 비롯해 게시판은 닫혔고, 글이 오가는 창문을 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글로 맺어진 인연도 사라졌다. 내가 문을 걸어 잠근 사이 누군가는 매일 포스팅을 했고, 누군가는 책을 냈으며, 누군가는 삶의 도약을 이루기도 했다. 나는 꼼짝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다시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왔다. 내가 만든 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웃긴 건 그런 내게 조마조마함을 느끼면서도 아무렴 어때. 하며 나름 행복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서성이는 글자를 움켜잡는 날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흩어지는 시간을 붙잡고자 타탁 타닥 키보드 소리를 들으며 단어로 문장을 만드는 나를 보고 싶어 했다. 마음만 그랬다. 무엇이 그토록 내 발목을 붙잡았는지, 혹은 나를 떠나게 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 척한다.
함박 눈이 쌓인 어느 겨울 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바라보며 밟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비밀 친구가 있다. 그 사람과의 시간은 흩어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인간관계가 업데이트되는 세월 동안 기억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얕은 기억력은 나 자신을 못 믿게 한다. 다시 끄적거림이 시작되었다. 별 거 아닌 지금을 쓰며 비밀을 간직했다. 물론 쓴다고 해서 기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쓰고 나면 그 종이는 건네지거나 버려지기도 하여 난 두 번 다시 일기를 보지 못했다. 그래도 사실의 기억은 추억으로 환생되어 어렴풋이 장면을 떠올릴 수 있으니 안도한다.
대필 작업을 해보기도 했다. 우연히 온 기회였고, 나는 그 기회를 빌미 삼아 나의 단어가 다시 키보드 위에서 춤추기를 바라였다. 꿈이었다. 타인의 삶에 대해 기록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수십여 년의 삶을 들춰보는 일은 눈과 귀를 활짝 열어젖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어서 온 힘을 다해 애써야 했다. 인쇄 몇 초 전까지 글은 내 손을 떠나지 못했다. 몇 달 동안 숨이 차고, 앞이 깜깜한 불완전한 작업이었으나 그저 해낸 것에 의미를 둔다. 그럼에도 실수는 여지없이 있었고, 그렇게 해냈으나 다시 쉼이 필요하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그토록 쓰이기를 바라는 나의 단어들은 내 발 밑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서성이는 글자는 다 사라졌을까. 고인 것이 깊고 넓으면 쉬이 잡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한줄기 빛이라고 말하기엔 거창하지만 한 사람과의 일을 소소히 쓰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일기였음에도 내게 숨을 불어넣었다.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그저 평범한 일상을 잠시 몇 분이나마 돌이켜 보는 일이었을 뿐인데,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조금씩 수년 동안 걸어 잠겄던 문고리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다행이다. 나는 완벽히 떠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 구간이니.
요즘 즐겨보는 것은 소설과 누군가 끄적거린 일기이다. 소설은 나의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매우 좋은 도구이기도 하며, 단출한 나의 인간관계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인간을 구경하게 해 주니 나도 어딘가에서 그들 중 한 명이라는 소속감을 부여한다. 매일 일기를 쓰는 그는 어디 사는 줄도 모른다. 그저 지구 반대편 어느 나라에서 애 셋을 키우는 중년의 여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바가 없지만, 그날 먹은 몇 장의 음식( 세끼 밥부터 커피, 군것질거리 등인데 단 하나도 빼놓지 않는다)과 출퇴근 길에 들은 노래, 가끔 동네 풍경 사진을 올리며 일상을 올리는데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 것뿐이라는 그의 독백에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일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혹시나 그의 일기가 올라왔는지 게시판을 몇 번씩 들락날락하기도 했으며, 혹시라도 글이 없다면 시차 차이가 있을 뿐이라며 애써 걱정을 누르기도 했다.
헛웃음이 났다. '몇 줄도 쓰지 못하고 있는 내가 고작 남의 일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하며 내게 자존심도 상하고 실망하기도 했지만, 나는 맛없어 보이는 밥 사진과 멋있고 운치 있어 보이는 그쪽 나라 하늘 및 거리 사진에 양념처럼 곁들여진 그의 쫑알거림을 기다리니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글에게 고맙기만 하다.
하늘은 봄인 듯, 땅은 겨울인 듯. 나의 머리는 쓰고자 하나 마음은 얼어 붙었다.
나의 실패는 여전할 것이다. 여전한 실패가 또 다른 움직임을 부를 것이다. 겉돌고 헛도는 인생의 어느 날 나는 서성이는 글자를 기어이 붙잡아 맸다. 고백 혹은 독백이 돼버린 이 흔적이 언젠가 웃게 할지도 모른다.
봄바람이 차다. 봄은 쿵쿵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다. 사계절이 서너 번은 돌고 돌아도 시큰둥했던 심장이 쿵쿵거린다. 먼지 같다 여겼던 하루가 봄비에 흠뻑 젖어 꿈틀거리나 보다. 서랍 속에 넣어둔 수많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지 말자. 그저 흩어진 시간이어서 바람처럼 그때와 비슷한 날이 다시 올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