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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May 26. 2022

내가 걷는 그 길 위에 삶의 속도가 있어

걷다 보면 보이는 것

요란하고 정돈되지 않은 봄날을 멀리 보냈다.  겨울을 밀어내려는 거친 봄바람에 여전히 한기를 느꼈고, 얇은 옷과 두꺼운 옷 사이에서 기분도 감정도 갈피를 못 잡았다.

물론 흐드러지게 핀 벚꽃 잔치를 하던 봄날엔 밤낮으로 길을 나서던 날도 있었지만 벚꽃은 한시적이어서 영원한 아름다움과 여유를 내어주지 않는다. 봄꽃에는 산뜻한 기분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염려와 걱정 등 명료하게 설명 안 되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기에 내겐 요란한 봄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일교차가 꽤 크지만 봄은 여름을 몰고 오는 법, 바람도 더워지고 있다. 겨울과 봄 사이 산책은 드문드문, 내 마음대로였는데 요즘엔 규칙적으로 걸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걷는 걸 좋아하지만 가끔은 현관문도 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한동안 오전 산책을 하던 초봄, 어느 길목에서 그녀를 만났다. 시선은 먼 산, 대각선 방향이었고, 어깨 한쪽은 푹 꺼진 채, 몸은 사선이고, 다리는 휘어져 비틀비틀 걸음이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산책로 탓에 족히 백 미터 앞에서부터 그녀의 기이한 걸음을 보면서 내려왔기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수가 괜히 빨라졌다. 행여나 넘어지진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고, 낯선 모습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내 그 마음은 사라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은 비틀려 있었지만 걸음은 내내 일직선이었다.


나의 마음 상태는 균형이 깨진 지 한참인지라 매일 아침마다 '걸어야 해'라는 말을 수십 번은 되내어야 겨우 밖을 나가던 때, 그녀와의 찰나의 만남은 내게 충격이었고 뭉클함이었다.  몸이 무겁다, 마음이 무겁다 하며 걷던 나는 내 앞에서 꼿꼿하고 꿋꿋하게 걸어 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에 한탄하던 나를 꾸욱 밀어 넣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세 번은 그녀와 마주쳤다. 그날부터 그를 또 만나진 않을까 호기심에 산책길에 나섰다. 나는 내려오고, 그녀는 올라오는 길 한가운데에 그의 실루엣이 멀리 보이면 나는 숨을 가다듬고 보폭을 일정하게 하며 나 자신을 정돈했다.


봄꽃과 봄바람에도 움츠러들던 내가 한 사람의 걸음걸이에 마음을 여러 번 다잡고 있었다. 가끔 시간대가 엇갈려 만나지 못하면 먼저 이 길을 지났겠지. 나중에 오겠지. 하며 문득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한 마디 인사를 나눈 적도 없고, 그저 서로 눈인사로 오늘도 무사히라는 마음을 건넬 뿐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앞을 향해 매일 걷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온 힘을 다해 이 길을 걷게 하는 것일까. 나는 답을 얻지 못한 채 그저 걷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만 하며 여전히 걷고 있다. 서너 달 엎치락뒤치락하던 걷기였지만 지금은 무작정 걷고 있는 내가 웃기기도 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 시간 이르게 나왔다. 햇살도 바람도 더워지기 전에 걷는 게 좋겠다 싶었고, 느릿느릿 일상을 사는 지금의 나에게 좀 더 여유를 주고 싶었다.

속도와 시간을 생각하며 걷지 않으려고 하지만 막상 길을 나서면 걸음에 욕심이 생긴다. 좀 더 멀리, 좀 더 빨리... 무슨 슬로건도 아니건만 걸음이라도 속도를 내야 느려지고 뒤쳐진 삶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은 희망을 품은 것일까. 1초에 세 걸음을 지키며 8킬로미터를 한 시간 반안에 걸었다. 그렇게 걷고 오면 그다음 움직임은 막상 세배로 느려진다. 빨리 걸었으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자 했건만 느리게 밥을 먹고 느린 청소를 하고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책 한 권을 들고 나오거나 일을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과 스쳤다. 지난봄에 자주 만나던 그녀는 어디쯤 걷고 있을까 문득 생각이 나니 재촉하던 걸음이 느려진다. 그때 눈앞에 백발의 허리 굽은 할머니가 보행 보조차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오고 계셨다. 할머니는 길 옆 벤치에 앉아 쉬었다 다시 일어나 걷기를 시작했다. 조깅하는 아저씨는 걷다 뛰다를 일정하게 반복하며 나와 할머니를 살짝 비켜갔다. 두 손을 맞잡고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는 아주머니도 보인다. 1초에 세 걸음을 걷느라 앞과 옆을 볼 겨를이 없던 나는 사람들의 걷는 모습에 또 삶을 깨닫는다. 빨리 걷는 것과 멀리 걷는 것이 사는 속도와는 별개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천천히 걸으며 타인의 걸음 속도를 지켜보니 바람에 내게 말한다.


아무도 정해놓지 않았다고. 빨리 가야 한다고, 혹은 저곳까지 가야 한다고, 뛰어가는 사람을 따라잡아야 한다고도, 느리게 간다고 채근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에서 나왔으리라. 길 위엔 모두 다른 보폭과 다른 속도로 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가 가진 힘, 내게 있는 힘으로 잘 걸어 나가면 될 터였다.

싱그런 초여름의 나무들은 초록잎들로 꽉 차서 바람과 춤을 추니 푸른 바다의 파도치는 소리로 들린다.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바다가 부서지는 소리로 착각이 드니 나무 아래 내 마음은 그 순간 가벼워졌다.  걸음의 속도를 느릿느릿 하니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이 나와 지나가는 사람을 모두 어루만진다.

그래, 그 누구도 저기. 저곳에 빨리 가야 한다고 정해놓지 않았다. 각자의 걸음 속도로 길을 걸으면 된다. 길 위를 걷는 우린 서로의 삶의 속도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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