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하여 시인이 되신 어머니.
매년 이맘때쯤이면 어머니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쌀 두 포대 씩 주신다. 20kg 포대 자루를 큰 박스에 담아 꼼꼼히 테이프를 발라 보내신다. 올해는 사과를 한 상자 추가로 보내셨다. 퇴근 후에 택배 정리를 하려 사과 상자를 열었는데 갈색 대봉투가 사과 위에 놓여 있었다. <내 이름을 자꾸 써 보게 된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시집과 작은 에코백, 납작하게 포장된 양초 두 개였다. 표지에 각산(고향집) 어딘가를 그린 듯 수채물감으로 칠한 아담한 서점 건물과 은행나무는 정겨웠다. 어머니께서 책을 출간하셨다.
시에서 주관한 사업으로 지도 강사인 시인의 도움을 받아 동네에 사는 여러 분들과 함께 쓴 시를 모았다. 내 사십 평생을 어머니로 보아왔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당신 스스로에 대한,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담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작은 마당에 심으신 감나무는 이제 우리 집 2층을 훌쩍 넘어 커버렸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동네 구석 작은 주택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 셋이 출가시키고. 남편과 함께 두 아들을 기르시며. 당신을 묵묵히 죽이고 사신 세월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다. 스물이 조금 넘은 젊은 나이에 낯선 곳으로 시집오셨다. 완고하신 시어머니의 등살을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많이 혼내셨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아이(동생)를 가져 무거운 몸으로 하얀 수제비를 빚으며 눈물짓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 딱 한 번 어머니께서 국민학교 3학년쯤 내가 눈이 나빠 안경을 맞춰주시고 저녁 늦게 집에 왔는데, 화가 나신 아버지께 매를 맞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벌벌 떨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빨리 장례식을 가셔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좀처럼 집에 오지 않던 아버지를 기다리며 서럽게 우셨다. 늦게 도착하신 아버지를 향해 원망을 쏟아내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국민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이던 막내 시동생은 나이를 먹을수록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져 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다. 새벽에 밥을 안치고 설거지를 하는 소리만 나도 구석방에서 큰 소리로 발광했다. 본인의 방을 청소하거나 칫솔을 바꾸면 집안이 뒤집어졌다. 우리 가족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에는 밤에 화장실 물 흘러가는 소리, 발소리만 들어도 소리를 지르곤 했다. 어린 내게도 그 공포는 아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데, 어머니는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가늠이 안 된다.
IMF로 아버지가 실직한 후에 당신 스스로 생업 전선에 뛰어드셨다. 남편을 따라 채소 장사를 잠깐 하시다 보험 영업을 꽤 오래 하셨다. 내가 방학 때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면, 큰 솥에 돼지고기 김치찌개나 미역국 등을 팔팔 끓이시며 우리 아침을 준비하시랴, 당신 출근 준비하시랴 바쁘게 움직이던 어머니 모습이 아련하다. 드세셨던 할머니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고서는 병간호도 도맡아 하셨다. 그즈음 인근 마트의 과자 매대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오전, 오후 번갈아 출근해 긴 시간 물건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셨다. 집에서는 할머니 수발을 들고 집안일을 하셨다.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손가락 마디가 시리고 아프시다 하셨는데, 무심한 아버지는 병원 가보라는 대답을 반복하셨고 멍청한 나는 안타까워만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배우길 갈망하셨다. 야학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보셨다. 책을 소중히 하라 내게 가르치셨다. 지금은 아마 버렸을 테지만 내가 군대에 있을 때까지는 우리 집에 내가 어린 시절 공부하던 책과 노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야학에서 알게 된 영어 선생님께 내 과외를 맡기셨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분께 영어와 수학, 논술 등을 배우며 부족했던 학식과 지성을 채울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도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셨다. 내가 과외를 받을 때, 맡은 편에 앉아 조용히 선생님 말씀을 듣고 필기하셨다. 때로는 피곤하게 일을 마친 후라 꾸벅꾸벅 졸기도 하셨다. 사자 그림이 있던 영문법 책부터 성문 기본영어와 종합영어, Word Power Made Easy라는 단어 책 등을 함께 보셨다.
할머니 수발을 들며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셨다. 마트 일을 하시던 중에도 상담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여 중학교에 상담 봉사활동을 나가셨다. 나 역시 교사가 된 후, 중학생들의 심리나 모습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일도 많아졌다. 도서관에서 책도 많이 빌려 읽으시고, 의용 소방 활동도 하셨다. 아버지와 많이 다투신 적도 있었으나 책을 탐독하고 마음 수양을 하시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이 넓어졌다 하신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후에 환갑을 맞으셨고, 정년퇴임을 하셨다. 퇴직 후에도 주말에 잠깐씩 마트에 나가 일을 하시지만, 그 외 많은 시간을 들여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신다. 그렇게 고대하던 운전면허도 따셨다. 기회가 될 때마다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시는데, 최근에는 처음으로 미국 동부를 여행하셨다. 시에서 하는 다양한 강연이나 봉사활동도 참여하신다. 그리고 책도 출간하셨다. 사진 속 케이크에 적힌 글귀처럼 많은 이들이 응원하였듯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고 안정적인 인생 2막을 시작하신 듯하다.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노년을 제대로 준비할 시간과 여유가 없으셨다. 퇴직을 하시며 인생의 한 막을 마무리 하셨다. 그러나, 환갑이 넘은 연세에도 아직 일하신다. 아버지도 함께. 멀리 떨어져 가정을 꾸린 첫째(나)는 박봉으로 자신의 울타리를 감당하기에도 벅차다. 그래도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라고 희망한다.
어머니가 쓰신 글 중에 "시를 쓰다 보니 친정 엄마 이야기 아버님 단감 이야기가 들어온다"는 문구가 있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내 안에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사뭇 다른 태도에 신선함을 느꼈다. 그렇다. 마음속에 무언가 들어오고 차올라야 글을 쓸 수 있구나. 들어오는 것이 먼저고 차오르고 나서야 나갈 수 있는 거구나. 항상 가족과 자식으로 가득 찼었던 당신의 마음속에 이제 다른 이야기가 들어오는 그 마음에 죄송하고 감사하고 또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