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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urth Daughter Oct 27. 2021

대구 우리집

우리집은 대구 봉산문화거리 안에 있는 지상 2층 건물이었다. 

지하와 1층에 아빠가 운영하는 인쇄소가 있었고, 2층이 집이었다.  

엄마, 아빠, 언니 셋, 남동생까지 우리는 모두 일곱 식구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27평 되는 좁은 집에 그 많은 인원이 어떻게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살았나 싶다.      

그 건물은 아빠가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짓고 내가 일곱 살 때 이사를 들어왔던 건물인데, 지을 때 좀 지으시지 왜 그러지 않으셨던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아마 건축법 때문에 더 증축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살기에 너무 좁긴 좁았었지.


언니들이 커가면서 나중에 옥상에 집을 증축하니마니 여러 번 가족회의를 했던 기억만이 아련하다. 결국 집은 증축하지 않았고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언니들과 좁은 방 하나를 함께 써야 했다. 네 명이 누우면 머리 쪽으로 사람 한 명 다닐 수 있는 통로만 확보되는 그런 방이었는데, 어릴 때는 잠들기 전에 언니들과 농담 따먹기도 많이 했고 싸우기도 많이 했다. 먼저 등교하는 언니들 발에 내 손이 여러 번 밟히기도 했던 그런 기억도 난다. 


일곱 식구가 같이 사니 신발은 얼마나 많았던지, 신발장이 꽉 차는 것도 모자라 계단에 신발들이 나와 있었다. 한 번씩 엄마가 신발 정리를 하자고 하는 날엔 각오해야 할 정도로 신발이 엄청났던 기억이 있다.      

신발뿐 아니라 집안에 물건이 엄청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섯 자식이 모두 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 통만 모아도 싱크대 안을 꽉 채웠으니, 엄마의 좁은 집 살림살이가 지금 생각해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당시에는 쇼핑몰이나 배달도 없어서 장도 매일 두 손 가득 보아 오셨는데, 나는 엄마와 시장에 그래도 자주 따라다녔다.      

엄마는 시장에 가서 한 바퀴 두 손 가득 장을 본 후에 시장 커피집에 나와 함께 짐을 맡겨두고 또 두 손 가득 장을 보아 오셨다. 엄마가 다시 장을 보아 오실 때까지 커피집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엄마가 괜히 나를 버리고 집에 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그 시절에는 할 법한 그런 귀여운 걱정들이었다. 엄마는 장을 다 본 후에야 커피집에 들러 나와 짐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가끔 양이 너무 많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지만 대개는 집까지 걸어 왔는데, 양손 가득 쥐인 짐 때문에 피가 통하지 않아 빨갛게 되었던 엄마의 손가락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도 가끔 엄마와 남대문시장 쇼핑을 다니는데, 엄마와의 시장 나들이를 어릴 적에 함께 해서 그런지 요즘도 즐겁다. 엄마와 다니면 물건 가격도 깎을 수 있다. 나 혼자라면 절대로 가격 흥정하지 못하는 성격인데, 엄마와 다니면 아이템 장착한 듯 흥정에 자신감이 붙는다. 엄마와 오래도록 시장 구경하고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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