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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of SNU Jan 22. 2022

서울대학교 한 청소노동자의 삶을 묻다.

제1편 "저는 당돌한 아이였어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노동자를 마주칩니다. 하지만 흔히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일상의 풍경과 같이 모호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불행한 사건이나 절박한 싸움이 있을 때에서야 우리는 매체를 통해 이 분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보고 듣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말 그대로 이야기일 뿐이며 노동자를 평면적인 등장 인물로 그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아쉬움을 품고서 서울대학교에서 일하시는 청소노동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 왔고 그 동안 누구와 함께 했는지, 그 안에 굵직하게 자리잡은 노동은 어떤 모습인지 물었습니다. 우리가 소중한 친구들에게 늘 그렇게 하듯 말이죠. 노동자 분께선 흔쾌히 담담하지만 또렷한 말들로 자신의 삶을 나눠 주셨습니다. 이를 다듬어 세 편의 글로 여러분에게도 조금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당돌한 아이였어요.
나무도 막 올라타고, 오빠들한테도 지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아직도 어린 시절의 그런 성향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Q. 그런 성격을 갖게 된 환경이 있었나요?

A. 옛날에는 어른들이 아들들을 더 좋아하잖아요. 위의 오빠들이 있어서 오빠들이 이유없이 괴롭히거나 심부름을 시키면 오빠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옛날 사람이지만 딸을 엄청 예뻐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애들도 많이 맞고 자라는데, 저는 한번도 맞지 않고 컸어요. 제가 어릴 때 신던 운동화가 지금 아이들이 신는 실내화와 비슷해서 발이 엄청 시려웠어요. 3월에 입학을 하더라도 춥잖아요. 제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아버지가 제가 발이 시려울까봐 그 얇은 신발에 솜을 넣어서 신기고, 저를 업고 학교에 갔어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보다 당당하게 자기 의견도 말하고 활발하고 그 시절엔 당돌한 아이였어요. 


Q. 선생님은 어린시절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롤 모델이 있었나요?

A.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은 한 것 같아요. 시골에서 살아서 내가 좀 크면 여기에서 안 살고 싶다. 서울에서, 큰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은 했었어요. 


Q. 왜 그런 생각은 하셨어요?

A. 그때는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Q. 서울에서 어떤 것을 하고 싶으셨나요?

A. 딱히 없었어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동경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되어서 정보가 많은 시절도 아니고, 시골의 경우는 서울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와서 소문으로 듣고,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멋있어 보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Q. 그 당시에는 주로 시골에서 농사를 하셨던 것 같은데, 선생님 부모님께서도 농사일을 하셨나요? 

A. 네. 우리 아버지가 담배잎(연초잎)을 키우는 농사를 하셨는데, 그 일이 고되거든요. 제일 더운 여름에 담배잎을 일일이 다 따서 수확하고, 그 잎들을 엮고, 바람으로 말리고하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어요. 담배잎이 점액질이 있어서 피부에 닿으면 끈적거리고, 거기에 냄새까지 진동해서 힘들어요. 잘못 말리면 돈도 안되고요. 그리고 어머니는 삼베를 가져와 쪄서 실로 만들고, 집에 있는 베틀로 베를 짜고, 한 필을 짜려면 며칠이 걸리는데 그걸 다 짜서 모아 시장에 팔았어요. 어른들이 많이 힘들어 보여서 어릴 때는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Q. 20~30대 청년기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때는 어떤 일과 생각들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A. 제가 스무 살이 넘어서 말하는 거죠? 그때를 회상하면 제가 한 18살 때쯤에 서울에서 약국에 근무했어요. 그때는 병원비가 비싸서 동네 약국에서 거의 모든 업무를 처리했어요. 

저는 그 당시 금호동에 있는 약국에서 근무했거든요. 지금은 재개발로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와서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지만, 그때는 산비탈에 못 사는 동네니깐 겨울에는 지금처럼 온수가 나오는 게 아니라 연탄을 때서 따뜻한 물을 데웠거든요. 그래서 연탄 위에 솥을 얹어 놓으면 아이들이 잘 못 건드려서 물에 많이 데어서 왔어요. 그래서 무료로 약사님 옆에서 도우며 거즈, 바세린으로 응급처치를 해줬어요. 그렇게 해서 나아서 오면 저는 기분이 되게 뿌듯하고 좋았어요.   


Q. 그럼 스무살 때 상경하신 건가요?

A. 20살 못 돼서 왔어요. 


Q. 어떻게 올라오셨나요?

A. 그때 저희 어머니의 사촌 동생분 그러니깐 삼촌분이랑 같이 기차타고 서울에 도착했어요. 삼촌이 서울에서 요꼬공장(니트짜는 공장)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일을 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다른 분 소개로 약국으로 취직했어요. 


Q. 서울에 상경했을 당시 기분이 어떠셨나요?

A. 서울에 왔을 때 기분이요? 그때 서울에 가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서울에는 무조건 돈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당시에 ‘서울에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기대하고, 좋았고 부푼 마음으로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어리둥절하고 앞이 깜깜한 느낌이고 불안한 느낌도 생겼어요. 


Q. 그러면 약국이 첫 직장이었나요? 그때 함께 근무하신 분이나 만난 사람들은 어땠나요?

A. 그래도 제가 적응력이 좋아서 약국 업무에 빨리 적응했어요. 그 당시는 살기 힘드니 외상으로 약을 가져가는 손님도 있고, 지금과 다르게 약국이 동네의 작은 병원 같은 역할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손님들한테 잘 대응하고, 손님들과 세상사는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도 같이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가끔 진상 손님도 계셨는데, 그때는 숨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굴면 아무 말도 못 하더라구요. 당당하게 맞서는 스타일이었어요. 


Q. 그러면 약국 근무하고 퇴근하고 남은 시간에는 무엇을 하셨나요?

A. 그때는 약국 근무가 지금처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어요. 만약에 제가 아침 8시에 나오면 저녁 9~10시 정도 퇴근해야 돼요. 그 시절은 12시간, 13시간씩 이렇게 근무를 했거든요. 그때는 일요일에 쉬지도 않았어요. 여가 시간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토요일 저녁에 일찍 퇴근할 때나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쉴 땐 손재주가 있어서 그때는 개인 공방 같은 곳에 가서 리본으로 꽃을 만들거나, 동양 매듭으로 옷고름이나 노리개를 만들거나, 서양 매듭으로 화분걸이도 만들고 했죠. 지금처럼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요리학원을 가는 게 아니라 취미 겸 해서 요리도 배웠어요. 그 시절 여자들은 그런 걸 좀 해야 결혼 같은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Q. 어디 놀러 가거나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서울에 오면 해보고 싶은 것, 경험해 보고 싶은 것들 것 있으셨을 것 같은데?

A. 그냥 뭐 음악다방! (웃음) 동대문에 가면 아주 큰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 자주 갔어요! 가끔 드라마에 보면 작게 나오지만, 동대문에는 아주 컸어요. 부스 안에서 DJ들이 사연도 읽어주고, 쪽지로 음악 신청하면 원하는 음악도 틀어줘요. 그리고 커피, 밀크(따뜻한 우유)라든지, 주스를 꼭 한 잔씩 시켜야 해요. 그래서 가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음료수 값도 몰래 내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동대문 시장 쪽으로 구경하면서 돌고요. 그때는 백화점이 있었지만, 비싸서 주로 구경만 하고요. 동대문에는 지금처럼 큰 쇼핑몰들은 없었고, 평화시장, 흥신시장처럼 시장들에서 쇼핑도하고, 구경도하고 돌아다녔어요. 


Q. 혹시 음악다방에서 만나시는 분도 있었나요?

A. 아니요, 그때는 그냥 즐기러 가는 거였어요. 그리고 약국 근무했을 때 제가 싹싹해서 그런지 어르신들이 자기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거나 손님들이 자기 동생이나 조카, 시동생 중매 서주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근데 그때는 시골과 많이 달라서 서울이 재미있고, 즐거웠거든요. 나름 행복했어요. 그래서 결혼 생각은 별로 없었고, 그때만 해도 스물 다섯이면 결혼이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그 당시는 스물두세살에 결혼들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땐 제가 나름 잘 나갔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덜 고단하고, 공장들은 노동환경이 좋지 않았거든요. 약국에서 일하는 거 자체가 재미있고 즐거웠거든요. 약국에서 일하다 보니 중매 서 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꽤 나가곤 했어요. 근데 그래도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서 별로 마음에 안 찬 거 같았어요. (웃음)


Q. 그렇다면 그 많은 경쟁자들을 이기고 선생님과 결혼하시게 된 남편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A. 그 계기도 손님이었어요. 그 사람 누나였는데, 저보고 맨날 그러는 거에요. “아이고 우리 올케 삼으면 좋겠다.”라고 계속 그러는거에요. 그래서 그럼 알겠다고 한번 만나 보자하고 예의상 만나러 갔어요. 그때만 해도 주선자랑 같이 나가는데 남편은 누나하고 나오고, 나는 우리 작은 엄마하고 나갔어요.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이름을 말하는데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집에 오니까 작은 엄마께서 “사람 어떠니? 괜찮니?”라고 물어봐서 “그냥 그랬지”라고 했어요. 그러곤 아무 생각없이 지냈는데, 우리 남편이 그 다음주에 저를 만나러 온거에요.


Q.약국으로 찾아뵈러 온 건가요?

A.네, 약국으로 온 거에요. 그래서 깜짝 놀았어요. 이제 왔으니까 속으로 “어떡해?” 하고 나가서 만났지요. 그랬더니 그러는 거에요. 자기는 나를 결혼 상대자로 생각했다는 식으로 말해서 그래서 엥? (웃음) 그땐 진짜로 그랬어요. 엥?? 그랬더니 우리 남편이 하는 말이 지금부터 생각을 해보래요. 그러더라고요. 그러곤 한 100일 동안 생각을 해서 그때 답을 달라는 식으로 말을 해요. 근데, 그러고 나서 매일 퇴근 시간에 맞춰서 찾아왔어요. 


Q.관심도 없는 사람이 계속 찾아오면 싫지 않았나요?

A.네, 처음에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계속 찾아오는데 저랑 같이 일하는 약사님들이 부부이신데 남편을 보고 사람이 참 괜찮은 거 같다고 하시고, 계속 오시는 손님들도 남편을 보고 사람이 참 착한 거 같다고 볼 때마다 그러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그랬는데, 계속 찾아오고 얘기하니까 괜찮은 거 같아서 계속 만나게 되었어요.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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