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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Dec 02. 2023

물이 사막을 건너는 법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한밤중에 작은 아이가 자다 깨서 울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은 무척이나 서러워했다. 목놓아 엉엉 우는 아이를 비몽사몽으로 달랬다. 눈을 뜨지 못한 채 세상을 다 잃은 듯 슬프게 꺼억거리며 엄마를 원망한다. "엄마 왜 그랬어! 왜 나한테 그랬어...으아..." 아이는 악몽을 꾼 거다. 꿈속에서 엄마가 뭔가 서운하게 한 게 있었나 보았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아이는 베개가 흥건해질 정도로 울고 나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빨갛게 상기되었던 얼굴이 말개지며 표정엔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작은 아이가 다섯 살 즈음 일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던 엄마가 야단치거나 쌀쌀맞게 굴었을 때 아이의 두려움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엄마 몸속에서 힘겹게 나와 세상을 처음 만날 때 아기는 먼저 울음을 터뜨린다. 공포는 인간 본능적인 숙명인가 보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할 두려움은 서로 리듬을 맞추며 삶을 흔든다. 삶에 대한 욕구에는 크든 작든 두려움이 함께 움직인다. 오죽하면 최승자 시인은 우리의 삶을 공포가 꽃수레를 올라타고 목적지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했을까. 꽃수레에 탄 공포를 잘 다스리는 것이 삶을 무사히 살아가는 열쇠일지 모르겠다.



 두려움은 내 것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 마음, 욕망을 놓치고 싶지 않은 아집에서 시작된다. 불안 앞에 머뭇거릴 때 그의 단짝인 욕망을 바라본다. 바라는 게 크니 두려움도 크다. 내 것을 지키고자 하니 주변까지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다. 욕망의 끝을 따라가보면 불안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까. 젊을 적엔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두려웠다. 학창 시절엔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과 성적에 대한 불안이 짝을 이루었고 사회생활에선 상사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남보다 뒤처지는 두려움이 나란히 삶을 쥐고 있었다. 다행히 나이가 들어가니 젊을 적 노골적인 두려움은 잦아든다. 하지만 불안은 점점 더 은근하고 깊게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지, 네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공포속에 가라앉은 침묵을 두드린다.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르게 사라진 일상을 보내고 나면 두려움의 그림자는 한층 더 짙어진다. 이러다 죽는 순간 후회하는 게 아닐까.



 마음에 오랫동안 머무는 이야기가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이야기이다. 수피즘은 설교보다는 시나 우화로 가르친다고 하는데 장황한 설법보다 마음을 깊게 울린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은 흘러 흘러 마지막으로 바다로 모여든다. 온 세상을 돌고 돌던 물은 숱한 여행 중에 한 번은 사막을 건너는 여행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물은 절망에 이른다. 달구어진 거대한 모래사막 앞에서 물은  깊은 모래 속으로 빠져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자신의 모습에 공포가 몰려온다. 사막은 묻는다. 선택하라,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물은 물론 살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사막은 공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라고 한다. 그러면 바람이 공기가 된 물을 실어 날라 다시 산으로 날라주겠다고 속삭인다. 거기서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물은 자신의 형태를 잃는 일이 두렵다. 육체에 갇혀 공기가 되는 순간을 공포스러워한다. 생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물이라는 형태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한정시켜버린 물은 죽음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떨고 있다. 


 결국 물 중 어떤 부분은 증발해 바람에 실려갔고, 또 어떤 부분은 사막의 모래 깊은 곳으로 흘러든다. 공기가 된 물은 다시 산 위에서 흘러내릴 수 있는 물이 되었지만 사막으로 흘러간 물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물에게는 오직 공기로 변하는 하나의 유일한 선택이 존재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한 일부분의 물은 그저 죽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음을 안다. 존재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면 물은 온전히 공기가 되어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쫓기듯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몬다.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영혼이 달아나면 살아도 살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만다.



 육체와 정신에 갇혀서 버둥거리고 있지만 결국 내게 남은 건 하나의 선택밖에 없는 게 아닐까. 생명이라는 본질을 알지 못한 채 껍데기의 나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에 아등바등거리는 내 모습이 사막 앞에서 고뇌하는 물의 모습 같다.  나를 버리는 일이 스스로를 살리는 일이며,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일이 되려 죽이는 일이 된다. 태어나면서 꽉 움켜쥐었던 두 손에서 힘을 빼는 일이 결국 인생의 지향점이지 않을까. 삶에 대한 긴장이 느슨해진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 막힌 벽 너머에 보이지 않는 길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다면 불안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내려놓는 마음에는 믿음이 존재한다. 나 자신을 믿고 내 세계에 신뢰를 보내야 가능하다. 



 아이가 커가면서 더 이상 자다 울지 않았다. 현실에서 꾸짖음을 당해도 팩 토라지다가 다시 엄마 품으로 기어들어왔다. 엄마가 화를 내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야단치는 엄마를 잠깐 원망하지만 아이는 조금씩 더 당당하게 스스로를 표현한다. 엄마의 사랑을 믿는 만큼 세상을 신뢰하는 마음이 자란다. 절망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더라도 그 너머에 창의적인 해답이 존재함을 믿는 순진한 긍정이 생겼을까. 꽃수레에 올라탄 두려움에 용기를 보탠다. 



 성장의 정의에는 "두려움을 마주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불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며 나를 바라보는 일은 삶의 중앙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불타오르는 욕망을 살피는 일,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움켜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일은 죽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할 허들이다. 삶은 겉으로는 불행해 보일지 모르지만 일단 그 시간이 지난 후엔 오히려 축복이라고 느낄지 모른다고 최승자 시인은 말한다. 욕망과 두려움 속에 지치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한 시간은 결국 죽음 앞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물은 산과 바다를 건너고 세상을 여행하다 또다시 사막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순간 물은 주저하지 않고 공기가 되는 용기를 보였을까.  한 번 더 사막의 공포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을까. 두려움을 등에 업은 채 여전히 신뢰와 욕망을 저울질하는 나의 영원하고도 우매한 궁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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