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러 집을 나섰다. 새벽잠을 물리치고 무거운 몸을 달래며 나섰는데 바닷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산란을 위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북이들처럼 어슴푸레한 동쪽 하늘로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잠도 덜 깨고 춥기도 한 새벽녘에 그토록 많은 인파가 모일 줄 몰랐다. 영문도 모르고 엄마, 아빠를 따라온 꼬마 아이들도, 친구들끼리 인증샷을 찍기 위해 모여든 청년들도 그리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의 간절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양은 꾸물대며 떠오르기 위한 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건하게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문을 외고 있는 영감님의 소원도, 두 손을 꼭 잡고 다정히 서 있는 젊은 연인의 소원도 궁금해진다. 새해 소원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연말과 새해의 시간 동안 가슴속에 머물러 있는 단어는 ‘의미’였다. 지나간 해를 돌아보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초대받지 않은 연말 시상식 소감을 생각하듯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한마디를 찾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을 완성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시험에 도전하여 성취한 것도 아니니 삶에서 뜻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오랜 숙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특별한 의미 없이 새해를 꿈꾸는 일이 채플린의 반복되는 무성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는 지구의 자전이 365번을 돌았다고 해서 다른 방향으로 튀어가지 않음을 알면서도 새해를 축복하는 건 우린 늘 새로운 의미에 목말라 있다는 뜻이 아닐까.
태국 끄라비 여행에서 만난 한 부부가 있었다. 여느 태국인들처럼 검게 그을린 피부에 소처럼 동그랗고 맑은 눈을 지닌 이들은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가 빌린 집의 호스트였는데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진심이 인도양의 투명한 물결처럼 느껴졌다. 집을 빌리더라도 열쇠만 건네주거나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 외에 일반적으로 집주인과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끄라비의 아리와 크리사나는 꾸준히 우리의 안부를 물어왔다. 첫날 그들은 집을 안내해 주고 떠나며 이 공간이 머무는 동안 천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수줍게 전했다. 그 말이 아름다워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아마 그럴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만족하는 눈빛이 가슴에 물결쳐 왔다.
한 달 내내 골똘히 생각하던 삶의 거창한 ‘의미’가 빛을 잃었다. 아리와 크리사나는 진심으로 내 공간에 머무는 이들이 행복한 휴가를 보내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생을 알지 못하고 투정만 부리는 내 어깨에 죽비를 내리치는 것 같다. 허울 좋은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의 여행이 기쁜지 그들의 끄라비를 잘 느끼고 있는지 우리를 보살폈다. 동네에서 열리는 장을 보여주기 위해 삼십 분을 걸려 달려오거나 좋은 식당을 데려다주고 기다리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을 서툰 언어로 전하면서도 빈곤한 내 표현력이 아쉬웠다. 그들은 우리의 휴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따뜻한 눈빛과 함께 표현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당신을 마음껏 환대하는 일이며 그 일이 얼마나 뜻깊은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와 가족들은 끄라비의 시간을 즐겼다. 산호빛 해안, 맹그로브 숲, 무엇보다도 친절하게 웃어주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우리의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을 감탄하는 일에 온 마음을 빼앗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리와 크리사나의 환대와 응원 덕분이었다. 타인을 기쁘게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들 앞에서 내 보잘것없는 ‘의미’는 말 그대로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타인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 삶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내온 나를 발견했다.
'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던 작은 세상에서 함께 돌아가는 넓은 세상을 바라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 곳에서 여행객들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아리와 크리사나를 떠올린다. 그들의 세계에 머물렀던 순간을 기적처럼 느끼며 나의 새로운 천국을 꿈꾸게 된다. 새해를 빌미 삼아 기도하고 싶은 소망은 타인과 나눌 기쁨을 꿈꾸는 것으로 시작해도 좋겠다. 내 옹색한 세상을 벗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내어준다면 궁색한 의미 따위는 찾게 되지 않을 것 같다.
모두가 기다리던 새로운 태양은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숨바꼭질하던 꼬마의 뒤뒤통수 마냥 시뻘건 정수리를 살짝 보여주더니 붉은 혓바닥이 미끄덩 튕겨 오르듯 쑤욱 솟아올랐다. 순식간 바다와 하늘 주위에 열기와 빛을 펼쳐내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새해가 떠올랐다. 아니 빅뱅 이후 수천 년 동안 떠오른 같은 태양이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새해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른 것이다. 바라보는 이들이 저마다 꿈꾸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그 꿈들이 교집합을 이루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아 본다. 정수리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태양의 열기 때문인지 끄라비의 아리와 크리 사나의 마음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