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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Sep 21. 2023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작은 백록담 오르기


 9월 중순, 산 아래에는 늦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한라산 등반 입구인 성판악 주차장에 도착하니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오늘의 등반은 언니와 나, 그리고 조카 민서가 함께 한다. 체력을 고려해서 작은 백록담이 있는 '사라 오름'까지를 목표로 삼았다. 몇 년 전 늦은 가을, 언니는 한라산에 올랐다며 전화를 했다. 눈 덮인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꼭 함께 오르자 약속했었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에 섞인 언니의 말은 줄곧 한라산의 정상을 상상하게 했다. 각자 배낭에 밤새 얼려둔 물 하나, 김밥 한 줄을 넣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경험자가 함께 하기도 했고 '작은' 백록담이라는 소박한 단어가 우리의 발걸음을 한결 가뿐하게 했다.



 탐방소 입구부터 완만하고 편안한 숲길이 시작되었다. 이미 산 중턱에 포근히 안겨 걸어가는 기분이다. 이 마음을 잊지 못해 늘 산을 그리워했다. 걷기만 해도 산은 맑은 공기와 푸르름과 햇살의 감촉으로 위로를 건넨다. 사라오름 전망대까지 왕복 12.8km. 백록담까지는 왕복 19.2km이다. 거대한 한라산의 어디 즈음을 향해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다. 정상을 상상하는 일은 초행자의 기쁨이 된다. 평일이라 드문드문 산을 오르는 이들이 보였다. 가슴을 열고 한참 발걸음에 가속을 붙이는데 이미 내려오는 이가 보인다. 이제 출발해서 언제 오르겠냐며 걱정스레 말을 건네지만 우린 웃으며 지나친다.



 산을 오르며 다양한 식물들을 마주한다. 소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동백나무 등 친숙한 나무 이외에도 한라산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들이 다양하게 서식한다. 해박한 식물 지식이 있었다면 산행이 더 즐거웠을까. 알지 못하는 시선으로 귀한 식물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기온 변화로 고지대에서 자생한다는 구상나무의 개체수도 줄어가고 제주조릿대의 서생지도 점점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고 있다. 제주조릿대는 말의 좋은 먹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기후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흡수율이 뛰어나 존재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키 큰 나무숲 사이사이에 나지막이 조릿대가 넓게 퍼져 자라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다양한 생명체들이 제 나름대로 생명력을 과시하며 산을 이루고 있다니 경이롭다. 순간 거대한 생명체 속에 숨 쉬는 흙먼지 같은 내 존재를 떠올린다.



 두 시간쯤 걸었을까. 왼쪽으로 600미터만 가면 사라오름에 다다른다는 안내판이 나왔다. 딱 다리가 후들거리는 시점이다. 숲 속 나무에 가려 감쪽같이 보이지 않던 호수가 오아시스처럼 나타났다. 산정호수. 작은 백록담이라고 불리는 그 호수다. 주변의 산과 나무와 하늘의 그림자를 안은 채 신성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호수 주변을 돌아 가파른 계단길을 남은 힘을 다해 오르니 계단의 끝, 나무에 가린 하늘로 시선이 모인다. 앞서간 언니와 민서의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발 한발 계단 끝을 향해 올랐다. 탁 트인 능선이 내 발아래에 놓였다. 아래로는 우리가 올랐던 울창한 숲과 저 멀리 바다와 오밀조밀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로는 곧 닿을 듯한 백록담 정상이 위용을 드러낸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잃었다. 백록담 아래 전망대가 있는 아담한 정상이다. 우리가 오른 산의 높이를 그제야 실감하고 뿌듯한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원한 냉장고 바람은 덤이다. 말끔했던 시야가 서리 같은 구름에 덮여 앞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가 다시 물러가기도 하니 시시때때로 변하는 다큐멘터리 한 장면 같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까. 정상에 오른 이들의 표정은 복잡하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아름다움을 마음에 한 번에 담아내기 힘든 기분, 또 누군가에게 이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어우러져 우린 점점 숙연해진다. 요동치던 다양한 감정을 자연은 괜찮다며 바람결로 어루만진다. 추위 속에 사라오름을 오르던 날, 언니가 전해주고 싶었던 감동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상상이 경험이 되는 순간이다.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오르는 인간을 떠올리며 헛된 욕망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성공을 갈망하듯 높은 곳을 향하는 일이 덧없는 일이 아닐까. 오르지 않으면서 편협하게 단정 지은 내 오만한 마음이다. 한계를 극복하며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인간이 겪는 감정은 티끌 같은 존재의 나약함이다. 성취가 아닌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오름이었다.



 어느 한 곳 막힘없이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는다. 산에서 불어오는지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알 수가 없다. 바람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나무숲으로 퍼져 나간다. 무엇 하나 거스를 것 없이 자연스럽다. 동생을 완주하게 했다는 언니의 기쁜 얼굴도, 처음 높은 산을 올라본 민서의 앳된 미소도 자연의 일부처럼 사랑스럽다. 골짜기에서 울리던 청명한 새소리처럼 우리도 또르르 깔깔 웃어보기도 한다. 편의점 김밥이 이렇게 맛있었냐며 공손히 마지막 밥알까지 깨끗하게 비워 먹었다. 가벼워진 가방에는 평생 잊지 못할 충만한 기쁨을 가득 채우고 싶다.



 산을 오를 때 충분히 힘겨웠고, 정상에서는 이미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렸기에 하산의 발걸음은 한층 더 발랄해진다. 일상에서의 존재가 의무와 욕망으로 더 이상 무거워지지 않도록 지금의 산뜻한 발걸음을 기억하고 싶다. 구름이 흘러가는 부드러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솔방울이 톡 또르르르 굴러가듯 삶에 힘을 빼고 나아가고 싶다. 힘들면 쉬었다 갈 수 있고 함께 응원할 수 있는 여유도 배운다. 다만 자연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등반을 오래오래 껴안아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쇼펜하우어는 등산의 기쁨은 정상을 정복했을 때이지만 최상의 기쁨은 험준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고 말했다. 고난이 사라진 인생은 삭막할 뿐이라던 철학자의 말이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길이 험할수록 가슴은 설렌다. 최종 목적지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더라도 우린 이미 오르는 기쁨과 존재의 겸허를 맛보았기에 다시 하산의 힘을 얻는다. 가벼워진 존재가 익숙해진다면 웬만한 고난에도 묵묵히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성판악 휴게소에 다다랐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시원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산 위에 두고 온 산정호수가 시원한 비를 머금으며 어떤 생명력을 뽐낼지, 숲 속 식물들이 얼마나 달게 빗물을 받아들일지 상상하게 된다. 자연의 존재란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당연한 듯 자신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가벼워져야 가능한 일일까.



제주도를 떠나오던 날도 날씨가 화창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활주로에 대기하는데 푸른 바다와 하늘이 넓고 입체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한 바퀴 크게 제주도 상공을 맴돌았다. 작은 창문을 통해 한라산이 또렷이 내려다보였다.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높은 한라산의 정상을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 비행기는 낮게 천천히 비행하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위엄이다. 산속에서의 기쁨이 살랑거리던 바람을 타고 내 마음으로 들어온다. 존재의 가벼움이 구름 속을 자유롭게 비상한다. 아름다운 배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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