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벤투스의 연고지 토리노는 이상하리만치 한국인들에게는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이탈리아 도시다. 밀라노·로마·나폴리·피렌체·피사·베네치아·트리에스테 등 이탈리아 내에는 아름답기로 소문 난 도시들이 즐비하지만, 토리노 하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이탈리아 사정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야 아넬리 가문이 창립한 이탈리아산 세계적 자동차 브랜드 피아트의 본거지라는 점이 그나마 유명하다. 그 토리노에서 피아트를 제외하고, 아니 피아트를 능가하는 브랜드가 있다면 세계적인 명문 클럽 유벤투스일 것이다. 그래서 축구팬들의 성지 순례가 꽤 많은 곳이기도 한데, 아마 현지에 오게 되면 조금은 이상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토리노에서 겪은 개인적 추억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이탈리아인들은 유럽인 중 가장 친해지기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서슴없이 어울릴 줄 안다. 서로 축구를 좋아하면 금상첨화다. 토리노의 한 호스텔에서 만난 한 토리노 청년도 그랬다. 한국과 축구라는 이슈가 연결되자, 2002 FIFA 한·일 월드컵에서의 그 기억부터 대뜸 꺼낸다.
“아, 그 경기”하고 떠올린다면 맞다. 파올로 말디니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를 만들어 준 ‘태극전사’의 영웅담은 이탈리아에서는 잊지 못할 비극이었다. 그래도 내 눈치를 본 건지 한국에 대한 악담을 하기 보다는 당시 경기를 진행했던 바이런 모레노 주심을 향했던 이탈리아인들의 저주를 더 많이 언급했다.
그의 말로는 토리노에서는 어느 광장에 모레노 주심의 모형을 설치해 지나가는 사람마다 뺨을 때리고 침을 뱉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인 처지에서는 어느 쪽이든 얘기를 이어가기가 난감하다. 그래서 돌린 화제가 유벤투스였다. 토리노를 방문했을 당시 2018-2019 이탈리아 세리에 A 유벤투스와 프로시노네의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벤투스의 홈 알리안츠 스타디움 @풋볼 보헤미안
“너도 그 녀석들을 보러 온 거야? 이 좁은 도시에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숙소를 구하기가 힘들어. 그리고 그거 알아? 그 녀석들이 드디어 토리노 클럽임을 포기했어. 2년 전에 황소(toro)를 엠블럼에서 떼어냈으니 말이지. 진짜 토리노 클럽은 따로 있다고. 지나가는 토리노 사람들에게 어느 팀을 좋아하는지 물어봐. 바로 토리노 FC지.”
그런데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그 토박이 청년이 정색하면서 이렇게 답했다. 꽤나 증오 섞인 반응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이렇다. 유벤투스가 더 유명할지 몰라도, 진짜 토리노 사람들을 대표하는 클럽은 토리노 FC라는 것이다. 적어도 호스텔에서 만난 토리노 사람들은 열이면 열 다 토리노 팬이었다.
그리고 이제 토리노 사람들은 유벤투스를 더는 토리노 팀으로 치지 않는다는 이유가 재미있다. 토리노 FC의 별명은 ‘일 토로(Il Toro)’, 우리말로 ‘황소 군단’이다. 황소처럼 힘이 쎄다는 이미지를 차용하려는 뜻도 있겠지만, 이런 별명을 붙인 이유는 따로 있다. 토리노의 상징이 바로 황소다. 즉, 토리노 사람들의 클럽이라는 이미지를 심은 것이다.
사람들은 유벤투스 하면 보통 얼룩말을 떠올린다. 그들의 독특한 유니폼이 얼룩말을 닮았기 때문이다. 현지인들도 유벤투스를 얼룩말에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유벤투스가 얼룩말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은 동물이 있다. 황소다. 과거 유벤투스의 엠블럼 속에 보면 분명히 황소가 있다. 유벤투스는 이 엠블럼을 통해 자신들이 토리노를 연고로 한 클럽이라는 점을 어필했었다. 그런데 이 황소가 2017년 유벤투스가 엠블럼을 바꾸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이 토리노 청년이 유벤투스를 토리노와 상관없는 팀이라고 규정해버린 것이다.
다음날 알리안츠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프로시노네전을 다녀오고 또 만났을 땐 “왜 그런 더러운 경기장을 갔느냐”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쏘아붙인다. 마치 강제 전도를 당한 사람처럼, 그 친구를 달래기 위해 앞으로는 ‘일 토로’가 되겠다는 농담 섞인 다짐을 하니 그제야 파안대소했다. 다시 떠올려보니 결코 가볍지는 않은 축구 이야기였던 것 같다. 덕분에 토리노 FC 팬들이 유벤투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토리노의 황소와 유벤투스의 얼룩말, 잘 지낼 수 있잖아? @픗볼 보헤미안
한 지역에 몰려 있는 클럽이 사이가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 유벤투스처럼 글로벌 클럽이 자리한 도시에서는 더 그렇다. 아무래도 라이벌이 잘나가니 시샘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토리노 라이벌리를 그렇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토리노의 랜드마크인 몰레 안토넬리아나를 차용해 데르비 델라 몰레(Derby della Molle)라 불리는 유벤투스와 토리노의 라이벌 구도는 계급 갈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쉽게 말해 유벤투스는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클럽이며, 토리노는 프롤레타리아라 불리는 노동자 클럽이다.
그런데 유벤투스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앞서 토리노를 피아트의 도시라고 했다. 피아트를 창립한 아넬리 가문은 유벤투스의 산파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곳곳에서 모여든 피아트 공장의 노동자들은 상사 혹은 회장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유벤투스를 응원했다.
이 때문에 토리노 FC 팬층에는 ‘토리노 토박이’라는 이미지가 또 덧씌워졌다. 그리고 일부 극성스러운 토리노 FC 팬들은 유벤투스를 그냥 ‘피아트 팀’ 혹은 ‘외지인 팀’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유벤투스의 정체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자존심이 아닌 실력으로 라이벌 구도에 접근하면 유벤투스가 압도하고 있다. 통산 241전 104승 64무 73패로 토리노를 발아래에 두고 있다. 이를 두고 토리노 FC 팬들은 ‘만약에’라는 단어를 뇌리에서 떨치지 못할 듯하다.
만약 1940년대 이탈리아 최강으로 군림했던 ‘그란데 토리노’의 비극적인 수페르가 참사가 없었더라면, 그래서 그 유산이 지금껏 내려왔더라면 토리노 FC가 유벤투스 못잖게 일류 클럽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란데 토리노’ 시절인 1940년대 초중반의 토리노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4연승을 달렸고, 그중 두 번은 다섯 골을 터뜨리며 혼내준 기억도 있기에 더 그럴 것이다.
알리안츠 스타디움에서 만난 유벤투스 팬들은 어땠을까? 파울로 디발라·레오나르도 보누치·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연속골로 3-0 완승한 홈 프로시노네전 때 접했던 유벤투스 팬들은 그러한 토리노 팬들을 약 올리듯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탈리아 곳곳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 유벤투스의 안방을 찾는 이탈리아인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축구팬들을 보며 토리노 FC 팬들의 말처럼 외지인 클럽이라는 인상을 받긴 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찌 됐건 토리노의 주인임을 넘어 이탈리아의 패권이 자신들의 손에 있다는 걸 마음껏 즐기는 분위기였다. 과격한 표현이겠으나, 토리노 FC는 안중에 없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기가 직접 맞대결이 아니니 그럴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007-2008시즌 맞대결 전에는 경기장 밖에서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고, 알리안츠 스타디움 개장 후 첫 진검승부 때는 경기장 좌석이 파괴되고 상대를 혐오하는 걸개를 붙여 양 클럽 모두 벌금을 얻어맞기도 했다.
붙여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날카로운 관계, 유럽 타 도시의 더비에 비해 다소 덜 주목받는 느낌이지만 데르비 델라 몰레, 즉 토리노 더비 역시 굉장한 폭발력을 지닌 라이벌 관계임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