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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Feb 27. 2023

바이에른 뮌헨의 아버지

나치로부터 클럽을 지킨 회장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 @풋볼 보헤미안

독일 남부의 거점 도시 뮌헨을 찾는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로 향한다. 2006 FIFA 독일 월드컵의 개막전이 킥오프한 곳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 중 하나로 꼽히는 장소다. 그런데 이 경기장을 향하던 대부분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곳이 있다. 알리안츠 아레나 정문 앞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특별한 이름이 헌정되어 있다. 커트 란다우어 플라츠, 나치 독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클럽을 사수한 ‘바이에른 뮌헨의 아버지’ 커트 란다우어 전 회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뮌헨은 안 좋은 쪽으로 독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뉘른베르크와 더불어 나치즘이 발흥한 곳이다. 실패한 쿠데타인 맥주홀 폭동을 통해 나치즘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가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방인 주데텐란트를 나치 독일에 넘겨준다는 내용이 골자인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히틀러의 기가 더욱 살아났던 일도 있었다. 그런 도시에 바이에른 뮌헨이 자리한 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바이에른 뮌헨은 아약스 암스테르담·토트넘 홋스퍼와 더불어 대표적인 ‘유대인 클럽’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익히 알려졌다시피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벌레 보듯 다뤘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는지를 따져 자국민과 점령지 시민들을 마치 쇠고기 등급 나누듯 분류했다. 기준이 된 뉘른베르크 법에 따르면 조상 여덟 명 중 다섯 명이 유대인일 경우 시민권을 박탈하고 수용소로 보내 가혹하게 다뤘다. 


물론 핏줄 상 뉘른베르크 법에 부합하더라도 유대교를 믿는다거나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다. 위 사진은 바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다루는 방법의 하나였다. 경찰에게 다시는 대들지 않겠다는 팻말을 목에 건 조리돌림이 나치가 지배하는 영역 곳곳에서 자행됐다. 나치 중심지 뮌헨에서 유대인으로 살아남는 건 그처럼 혹독한 일이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다하우 수용소 정문 @풋볼 보헤미안

그래선지 뮌헨에서 한시간 가량 떨어진 자그마한 도시 다하우에는 악명 높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가 자리하고 있다. 폴란드에 자리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처럼 오로지 유대인을 죽이는 곳은 아니다. 노동 교화만 이뤄지는 곳이다. 그러나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탄압받는 삶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 모른다. 실제로 방문한 다하우 수용소는 숨을 턱 억누르는 삭막함에 몸서리를 칠 정도로 분위기가 음산했다. 바로 이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으로 활동했던 란다우어가 붙잡혀 있었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지역 내 정서와는 별개로 유대인과 꽤 친숙했던 역사가 있다. 발기인 17명 중 두 명이 유대인이었으며, 지역 내에서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바탕에도 유대인의 지지가 기반이 됐다. 


란다우어 역시 지지자 중 하나였다. 유대인 금융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란다우어는 축구에 푹 빠진 소년이었다. 직접 선수가 되기 위해 17세 때 바이에른 뮌헨의 문을 두드렸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매우 컸다. 

하지만 선수로서 소질은 별로였던지 방향을 돌렸다. 가업이었던 금융업에 종사했는데, 완전히 축구와 연을 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란다우어는 자신의 영역에서 사업적 능력을 키운 후, 이것이 축구 클럽 바이에른 뮌헨의 경영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 여겼다.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클럽에 봉헌하고자 했다. 


란다우어는 만 29세였던 1913년 바이에른 뮌헨 회장에 당선됐다. 1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전장으로 끌려가야 했지만, 전쟁이 끝난 1919년 다시 클럽으로 돌아와 회장직을 다시 성실하게 수행해나갔다. 이때 란다우어는 클럽의 초석을 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유럽 최강으로 떠오르고 있던 이웃 국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축구의 장점을 흡수하고자 했다.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폐셔널리즘이 스포츠계내에서 격렬하게 이념 대립할 때, 선수가 자신의 능력을 보상받는 것이 옳다고 여겨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덕분에 바이에른 뮌헨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회장 재임시기인 1932년 남독일 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는 클럽 역사상 최초의 우승이다.


무엇보다 란다우어의 최대 업적은 바로 유스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팬층이 두꺼워지면서 새 경기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질 때 란다우어는 홀로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밀어붙였다. 


이 유소년 육성 시스템은 1960년대 들어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 최강으로 우뚝 서게 한 토대가 됐으며, 나아가 현재 바이에른 뮌헨을 세계 정상급 클럽 반열에 올려놓는 원동력이 됐다. 바이에른 뮌헨이 역대 최고의 회장으로 그를 지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이에른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 바로 앞 광장인 란다우어 플라츠 이정표 @풋볼 보헤미안

1933년은 바이에른 뮌헨이 명문으로 막 나아가려는 시기였다. 하지만 하필 그때 히틀러가 사실상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게 문제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이념을 사회 모든 분야에 이식하고자 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축구도 포함됐다. 베른하르트 루스트 나치독일 정권 교육문화부 장관은 “모든 유태인과 마르크스주의자 선수들은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독일축구협회를 비롯한 독일 내 각 클럽들이 해체됐다가 히틀러의 입맛대로 재편됐다. 바이에른 뮌헨도 그 중 하나였다.


아니, 재편된 걸 넘어 주된 타깃이었다. 회장이었던 란다우어부터가 유대인이었으며, 당시 뛰어난 지도력으로 클럽을 강성하게 만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리차드 콘 감독을 비롯해 몇몇 유대인 선수들이 팀에 속해 있었다. 자리를 내놓음은 물론 유대인들을 클럽에서 모두 내쫓으라는 정권의 요구를 차일피일 미루다 미운털이 박혔다. 


이 난리통을 피해 콘 감독은 바르셀로나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겨 화를 피했지만, 란다우어 회장은 앞서 언급한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바이에른 뮌헨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한 회장이 졸지에 모든 걸 잃고 죽음의 문턱에 놓이게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33일 만에 ‘지옥’인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라는 점 때문에 특별히 사면받았는데, 똑같은 조건에 놓였던 다른 클럽 회장이 끝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 이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게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함께 수용됐던 형제 세 명이 죽었고, 여동생은 생사불명이다. 그는 모든 걸 잃고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해야 했다. 정확히는 추방이다.


란다우어는 스위스로 추방당하면서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선수 포함 바이에른 뮌헨과 관련된 모든 이들과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것이다. 나라 밖으로 쫓겨난데다 다시 들어갈 가능성도 없으니 바이에른 뮌헨과 인연도 거기서 끝이라 여겼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든 팀과 만나게 된다.


1938년 바이에른 뮌헨이 취리히에 친선 경기차 원정을 왔다. 바이에른 뮌헨이 온다는 소식에 란다우어가 한걸음에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이기에 나치 독일의 손길이 닿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이 관중석에 있던 란다우어를 발견했다. 그리고선 란다우어 앞에 도열하더니 뜨겁게 박수를 쳤다. 나치 독일 시대상을 감안할 때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인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 일화는 2014년 독일 영화 <데어 프레지던트>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비록 시대상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은 란다우어의 공헌을 잊지 않은 것이다.


전후 란다우어는 곧바로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핍박받은 과거, 유대인이 괴롭힘을 당했던 일 모두 불문에 부치고 클럽 재건에만 집중했다고 하니 누리꾼 표현대로 ‘대인배’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헌 덕에 바이에른 뮌헨은 명문의 길로 걸어갈 수 있었다. 칼 하인츠 루메니게 바이에른 뮌헨 명예회장은 란다우어를 두고 “작금 바이에른 뮌헨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부인할 수 없다. 실로 클럽을 사랑했으며, 모진 고초를 당하고도 그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인물이었다. 알리안츠 아레나 정문 광장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이유다.

란다우어 회장을 추모하는 명패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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