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많은 순간 우리는 수행적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을 때나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세계는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고 눈을 마주친 세계로 변한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과 내 몸이 체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지나가버린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까 버려버리자 했던 것은 문장만을 받아들였을 때. 그러니까, 요가 수련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이고 지나간 아사나는 미련을 갖지 않아야 하는 건데 수련 영상을 찍고 내 몸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미련 가득한 일인 것이니, 어찌하여 요가는 이리도 삶과 밀접하여 이 깨달음을 결국 삶을 또 가져오게 만드는 것일까.
요가하기 전에는 요가하는 사람들에게 요가 진짜 좋아요라는 말을 계속 들었고, 때로 요가 철학과는 어긋나는 요기들을 보면 머리에 물음표를 둥둥 띄웠는데 내가 요가를 시작하고 나서 요가 진짜 좋아요라고 말하고 다니니, 어쩌면 요가는 종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시작은 종교가 맞는데 지금은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결국 또 종교처럼 전도하는 마음) 나는 요가랑은 안 맞는 몸이야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에헴… 목을 가다듬고, 요가에 맞는 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시작하는 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구? 이거 정말 해보면 아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어느 날엔가 교회 왜 안 다녀요? 진짜 이거 모르는 사람 불쌍해요라고 말하던 어떤 사람의 말이 떠올라 또 화들짝 놀라지만, 그래도 조금 더 주장을 해보자면 육체를 확실하게 쓴다는 것에 그 좋다는 말이 마냥 신비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실 부작용이라고 한다면 요가를 본격적으로 수련하고 나서는 내 안에 없던 질투심이 마구 생기고 말았다는 것. 나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는데, 단체로 매트 위에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지만 고난도 동작을 척척해내는 것만 같은 도반들을 보면 나에게 저 아사나는 왜 없는 것인가 하며 아주 이글이글 끓어올랐고 그걸 아닌 척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러니까, 요가를 하다 보면 질투심을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아니, 내가 평소에 없던 질투를 이렇게 생기게 해 놓고 그걸 또 내려놓으라니, 굳이 안 해도 될 수련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며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내가 대체 어떻게 동작을 하고 있는가 하면서 영상을 찍어서 보기도 하는데 기를 쓰고 했던 거 같은데 영상에 대충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오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이 나를 또 괴롭힌다. 사서 고생하는 요가인가.
근데 아마도 강사일을 시작하면서 더 마음이 복잡했던 것 같다. 정신적 평화를 위하여 시작한 요가에서 다시 타인의 시선과 여성으로서의 육체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이 다시 피어오르면서 찐따밈처럼 내가 잘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외관 때문이라는 것을, 배우를 할 때에 극복하지 못하는 못난 점이 요가에서도 똑같이 발현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바로 업으로 시작해 버렸을까, 하면서도 안 하면 뭐 해 먹고살래라는 질문이 같이 따라오기 시작하니 자문자답 경지가 거의 지킬 앤 하이드.
깨달음은 결국 갑자기 오는 것이니까.
매트 위에서 수련을 하던 어느 날에 아쉬와 산찰라 아사나가 전보다 조금 더 견고해졌다고 느껴졌을 때, 발바닥에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졌을 때, 아, 갑자기 머릿속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지나간 것을 미련 같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은 감각하고 있었다. 내가 영상을 찍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내 몸이 자각하는 그 감각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물론, 최종 단계에 진입한 아사나는 아름답기도 하며, 우아하기도 하며, 터프하기도 하며, 그야말로 멋짐을 뿜어내는 것은 맞는데 내가 왜 요가를 하는 것인가에 질문을 다시 던졌을 때, 나의 견고해진 발바닥이 답을 하는 것 같았다. 요가를 시작할 땐 안내자가 말하는 몸의 방향이 대체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낑낑거리는 게 다였는데, 어느 날 내 몸이 그 길은 여기였어라고 안내해 주는 기분. 그저 지금의 아사나만 있을 뿐, 찰나는 과거가 되는 법이니까. 대신 지금을 내가 견고하게 보낸다면 또 맞이하는 찰나는 전과는 다른 지금일 것이라는 것.
깨달음의 뻔한 문장일지라도, 내 육신이 그것을 감각해 버렸으니, 나는 괴로움에서 한발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