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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Jan 22. 2024

믿는 만큼 자라는

어느덧 후반 작업도 마무리가 되어가니 이제 슬슬 숨 쉴 틈이 생긴다. 정신을 차리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지난 반년의 바쁨이 지나간 자리마다 폐허다. 특히나 우리 집 식물들이 엉망이다. 장기간 출장을 다니며 집을 오래 비운 적이 많고 퇴근하고는 쓰러져 자기 바빴던 터라, 화분 흙의 마름 정도를 확인한다든가 잎이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지를 만져본다든가 하는 의식은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지난 여름, 처음으로 우리 집 식물 생태계에 병충해가 창궐했고 그 결과 식물의 절반 정도가 떠나갔다. 5년 넘게 키운 우리 집 터줏대감이 떠나갔고, 생명력 하면 빠지지 않는 몬스테라의 화분 세 개 중  단 한 개만 남았다. 그 밖에도 떠나간 많은 식물들이 있다. 찬 겨울의 베란다 창가에는 그렇게 흙만 남은 화분들이 줄줄이 서있다. 


무정하게도 식물들이 하나둘 잎을 떨구고 색이 변해갈 때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바쁜 나 때문에 이렇게 다 죽겠구나, 아쉽지만 내년 봄에 또 새로 잔뜩 들여서 다시 정성껏 키워줘야겠다,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랬던 화분들을 절반이라도 살려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위태롭게 길게만 자라던 식물이 아래서부터 하나 둘 잎을 떨구며 죽어갈 때 과감히 윗부분을 잘라 물꽂이를 해보자고 나를 설득하고, 식물이 답답해 보인다며 더 넓은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벌레들의 공격을 받아 죽을 날만 기다리던 나비란을 베란다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자, 엄마는 상한 잎을 싹 정리해 다시 집안으로 들여줬다. 신기하게도 그러자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식물들이 다시 빼꼼 새 잎을 내고 조금씩 전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식물 전문가였나? 아니, 엄마를 식물의 세계로 이끈 건 오히려 나였다. 키우기 쉬운 것부터 키워보라며, 흙을 만져보고 잎의 처짐 정도를 살피며 물을 주면 된다고 알려준 건 식물 선배인 나였단 말이다. 다만 엄마는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나와 엄마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생명을 키워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일까?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요리조리 살아날 것 같은 방도를 찾고 잘 자라라 응원해 줬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장래희망은 만화가였다. 당시 <아기공룡 둘리>에 심취해 있던 나는 만화가 김수정(아직도 이름이 기억난다) 화백을 존경했고, 이런저런 학습 만화와 일상 만화를 보며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상을 만화로 그리곤 했다. 그걸 본 엄마는 늘 너무 재밌다고 해줬고 그럼 나는 신났다. 나름의 줄거리도 있고 반전도 있다며 꽤나 구체적으로 칭찬해 줬던 게 기억난다. 그러나 만화가의 꿈은 공교육을 만나 금세 좌절되었다. 교실 어디를 둘러봐도 나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꿈꾸는 상은 내 손을 통해 전혀 구현되지 못했다. 어떤 선생님도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며 칭찬해주지 않았고, 미술 수행 평가 점수도 늘 처참했다. 그렇게 나의 그림 실력을 객관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그러나 엄마는 여전히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그때 그 만화는 정말 재밌었다고 말한다. 만화가의 꿈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드라마를 만들고 있으니 넓게 보면 유사한 일을 하게 된 셈이다. 어쩌면 나도 우리 집 식물들도 그런 따뜻한 응원과 믿음 속에서 튼튼히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려준 식물들을 앞으로 다시 잘 기르는 건 이제 내 몫이다. 올해는 조금 더 참고 기다리고 믿어주며 키워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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