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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Feb 18. 2024

상상할 수 있다면 내 세계

올해 다이어리는 하루치 일기를 쓸 수 있는 공간이 평소보다 좁다. 일기장을 펼치면 보이는 양 페이지가 한 주치 일기의 공간이다. 하루에 한 페이지를 다 써야 하는 일기장을 써보기도 했지만, 그 정도 분량을 매일 꾸준히 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담 없이 가볍게 꾸준히 쓰려는 마음으로 작은 일기장을 골랐다.


분명한 장점이 있다. 밀린 날이 많아도 포기하지 않고 금방 채워 넣을 수 있다. 마음먹고 빠르게 쓰면 30초 정도로 하루를 다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며칠 전 문득 일기를 쓰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쓸 수 있는 공간이 몇 줄 없어서 깊은 생각까지 가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공간이 넉넉했으면 결국 썼을 법한 내밀한 생각들을, 나도 모르게 그냥 안 쓰고 넘어가거나 모호하고 쉬운 표현으로 퉁치고 있었다. 복잡한 생각이 드는 건에 대하여 '기분이 묘하다'는 말로 정리했다. 하루에 할당된 공간이 많았더라면, 분명 묘한 기분을 이리저리 해체해서 길게 썼을 것이다.


상상이나 상념 같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무형의 스파크는 특히 환경을 많이 타는 것 같다. 몇 년 전 미국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에 다녀왔다.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7시간짜리 디럭스 투어를 했다. 골프 카트를 타고 다니며 세트 구석구석을 돌아봤는데도 아쉬울 만큼 스튜디오가 정말 컸다. 빽빽하게 들어찬 세트동과 끝없이 펼쳐진 야외 오픈 세트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 교외 한적한 마을, 번화한 대도시 한복판 등 워너 브라더스 영화에 나온 다양한 공간이 그곳에 있었다. 조금만 미술 세팅을 바꾸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이 세트 안에서 표현해 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이런 현장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감히 상상할 있는 세상 또한 그만큼 크겠구나 싶었다는 점이다. 국내의 다양한 오픈세트장에 가봤지만, 이 정도로 다양한 공간들이 훌륭한 퀄리티로 구현되어 있는 곳은 아쉽지만 없었다. 작품 기획 단계에서 아무리 자유로우려고 해도 실제 촬영이 고려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CG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세트장에 따라 상상의 폭도 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부러움에서 끝내고 싶지는 않고, 다시 올해 일기장을 생각한다. 칸이 좁으면 부지런히 정확한 단어를 골라 밀도 높은 글을 쓰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더 넓은 칸이 있는 일기장을 사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이 생각을 제한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 내가 가진 세계 안에서만 상상할 있는 아니라, 상상할 있다면 세계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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