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일주일 앞두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집안 곳곳의 잡동사니들을 처분할 때가 되었다. 거실 장식장 위, 컴퓨터 책상 위, 옷방 서랍 안, 식탁 옆 구석에 쌓여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버려야 한다. 이것들을 다음 집까지 데려갈 이유가 없다. 안일한 마음으로 조금씩 늘린 짐들이 이제는 제법 집을 꽉 채우고 있다.
난 뭔가 버리는 데 재능이 없다. 이사 같은 큰 이벤트가 있지 않는 한, 선뜻 그 처분을 시작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던 정리 명언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 소유 여부를 결정하기에 설렘이라는 감정은 너무 얄팍한 것만 같다. (흥!) 그 안에 담긴 추억과 영감과 잠재적 가치 등등등도 고려해 달란 말이에요.
그런 이유로 우리 집에는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필요 없는 것들이 꽤나 많다. 그 대표적인 것 하나.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 십 년이 넘은 그 책을 대체 왜 아직까지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 책 속 내 필기가 기가 막히다. 악필인 내게 이건 꽤나 드문 일이다. 단권화(수험생만 쓸 법한 용어)를 위해 새 교과서를 샀어서 책 상태도 아주 좋다. 일 년에 몇 번 펼쳐보느냐 하면 0번이다. 몇 년에 한 번, 이걸 버려 말아 고민할 때만 펼쳐본다. 하지만 몇 차례의 그 냉혹한 심사에서 이 책은 번번이 다음 기회를 얻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책이 언젠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대체 그걸 누구에게 증명할 것이냐? 모르겠다. 그걸 증명할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정 필요하면 사진을 찍어 보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가 열심히 볼펜까지 바꿔가며 정성을 들여 필기한 책이 종이 재활용 박스에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적으면서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번에는 꼭 버릴 테다.
또 하나, 절대 입을 일이 없는 옷들. 그 옷들은 유행이 지났거나, 이십 대 초반에만 입을 수 있던 과하게 귀여운 스타일이거나, 혹은 너무 낡았다. 그럼에도 선뜻 버릴 수가 없다. 근현대사 교과서와는 조금 다른 이유이다. 이 옷들의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그것이 내가 재봉틀을 산 이유이다. 모두 잘라서 헤어밴드로 방석으로 앞치마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다. 자원 재순환의 측면에서,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각오로 그냥 둔 옷들이 몇 년째 제자리에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일단 가져갈 예정이다. 아직 그 작업을 못 한 이유는 재봉틀 책상이 없기 때문이거든. 이사만 가면 바로 재봉틀 책상을 살 테다. 그렇게 이상한 전제 조건이 덕지덕지 붙은 가능성을 붙잡는다.
그리고 정말로 다시 볼 필요가 없는 전전작품 스케줄표라든가 대본들, 민감한 개인 정보들이 담겨있는 서류들. 이건 그냥 당장이라도 파쇄하면 된다. 미련도 가능성도 아니고, 귀찮음뿐이다. 이것들도 이번 기회에 꼭 처분할 것이다.
한 정리 관련 영상에서, 요새 집 평당 가격이 얼마인데 쓸데없는 것들을 위해 그 공간을 쓰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머리가 띵했다. 주어진 공간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 이것은 분명 미련인 것 같다. 새 집에서는 지금보다 일상을 단순하게 만들 것이다. 깔끔한 집에서 꼭 필요한 것들과 함께 살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정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어쩌면, 혹시나, 만약에는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