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유가 생겨 갑자기 제주에 왔다. 어제 막차가 끊길 시간까지 회사 편집실에 있었던 것이 꿈인지, 지금 가벼운 옷차림으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조금 헷갈린다. 지난밤 야근을 하던 중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오랜만에 생긴 휴일이니 집에서 쉴 수도 있었다. 사실 그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새 집 정리도 덜 되었고, 하필 7말 8초인 지금은 극성수기라 어딜 가든 비싸고 붐비니까. 게다가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에는 아무런 변수도 없는 나 홀로 집 만한 게 없다.
하지만 자주 오지 않는 이 기회를 조금 더 특별하게 쓰고 싶었다. 일상에서 어딘가로 출발한다는 기분이 드는 일은 잘 없다. 여행을 떠나는 날만 느낄 수 있는 확실한 설렘이 있고, 나는 그 설렘을 무진장 좋아한다.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캐리어를 채우는 동안, 가볍게 묶어둔 헬륨풍선처럼 아직 현실에 발붙이고 있지만 언제든 날아갈 준비를 하며 들뜬다.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큰 호기심과 설렘 덕분에 출발하는 날은 늘 듣던 노래도, 늘 가던 길도 다 새롭게 느껴진다.
취업준비생 시절, 환기가 필요할 때면 지하철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보다 쾌적하고 신선한 공간은 없었다. 입국 수속을 밟는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가만히 구경을 하다 집에 오곤 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던 그땐 그렇게라도 출발하는 사람들의 정기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행길에 엄청난 깨달음이나 대단한 낭만이 오지 않는다는 것쯤 이제는 알고 있다. 먹는 것도 보는 것도 크게 새로울 것은 없을 테다. 현실에서 내게 스트레스를 주던 것들은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출발이 주는 그 확실한 감각 하나만으로도 여행은 분명히 가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