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 영화의 90퍼센트는 대사량을 절반으로 줄여도 충분히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거니와 오히려 그렇게 했을 때 예술적으로 훨씬 우수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 박찬욱 책 <몽타주>(2005) 중에서
퇴근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안 들어도 되는 말이 더 많은 것 같다.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하고 또 듣지만, 오늘 오간 말들 중에 정말로 필요했던 건 얼마나 될까?
필요라는 게 단순히 효율의 문제는 아니다. 감정적 지지든 정보의 교류든 어떤 의미로든 아무리 후하게 그 쓰임을 쳐줘도 사실은 그 밖의 말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짧게 떠돌다 사라지는 말들. 그러다 괜히 잠 못 이루는 연약한 새벽 뜬금없이 나타나는 말들. 의미 있나?
'상업 영화의 수다에 신물이 나' 급기야 주인공 중 한 명을 말을 못 하는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젊은 시절 박찬욱 감독의 글을 읽으며 이번주 유독 말에 대해 자주 곱씹었다.
한 사람에게 말의 총량제가 있다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쓰게 될까? 하루에 딱 열 마디만 할 수 있다면?
혹은 누군가 일평생 할 수 있는 말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 세상은 지금과 많은 게 다를 것 같다. 할 말을 고르고 골라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무엇이 나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중요한 말일까 생각한 후에야 신중하게 소리를 낼 수 있다면, 어쩌면 모든 게 조금 더 고요하고 동그랄 지도 모르겠다. 굴러다니는 말들을 이리저리 전하거나 타인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괴짜 거나 바보 취급을 받을 테다. 아니 그 소중한 기회를?
다양한 소통의 부재 상황을 목격하며 어휘력을 길러 더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사실은 단어가 아니라 어쩌면 말 그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태어난(?) 이래 시종일관 말이 많았다던 내가 이런 상상을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