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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속도, 박자에 대한 어떤 것

이력서를 쓰다 멈췄다

지금 있는 회사는 올해 세 번째 직장이다. 당연히 내가 대단해서 스카웃을 당한 건 아니다. 초봄엔 대기업 사무보조 아르바이트, 초여름엔 예전에 퇴사한 전 직장에 다시 들어갔다가 꾸준히 노답(어떤 의미에선 예전보다 더)인 것을 입사 이틀만에 알고 다시 이직 준비를 해서 이달부터 새 회사에 출근하게 됐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구직자다.


신입이라고 하기엔 서류에서 걸러질 나이에도 나는 신입으로 원서를 넣는다. ‘나이가 뭐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력서를 쓰는 중이나 가끔 친구를 만날 때 현타가 오곤 한다. 어엿하게 승진한 친구들의 고미거리는 더 이상 구직이 아니다. ‘모두의 리듬이 같지 않으니 자신의 길을 걸으라’라는 류의 수많은 조언과 간증(신빙성 있게 편집한 유명인의 사례라던가)을 보면서 위로 받으려 하지만 월급통장을 보면 속이 쓰리다. 나는 지금 200만원 짜리 사람이구나 싶어서.


어쩌다보니 글의 시작이 아주 우울한데, 막상 이 글을 쓰는 내 컨디션은 좋은 편이다, 정말루. 성수동 나들이에서 ‘마! 느그 친구랑 밥도 먹고! 빵도 먹고! 책도 사고! 커피도 마시고! 다 했어 임마!’ 하다 보니 내 상황과는 별개로 기분은 좋다. 흐릿한 날을 좋아하는데, 날씨도 흐릿하여 아주 평온하다.  


성수연방의 만두 전문점 ‘창화당’. 테이블 간격이 좀 좁아서 불편했지만 모듬만두, 김치볶음밥, 완탕면 모두 무난히 맛잇었다.(신제품 트러플 만두에 트러플 향이 더 강했으면 좋았겠)
성수연방의 ‘천상가옥’. 커피와 빵이 맛있는데, 오후가 되니 사람이 엄청 많아졌고, 시끄럽다. 근데 전등 안의 식물은 보기 예쁘긴 한데 저래 키워도 괜찮은 건가...?


회피와 결정 사이


금요일 오후, 회사에서 이력서를 쓰고 있었다. 당일 마감이지만, 전날 이력서를 다 제출하지 못하고 자버려서 회사 일을 하면서 작업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훈련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느슨함이지만 나는 수습 교육을 받고 있고, 이걸 열심히 해야할 의무가 있는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나 또 회피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애초에 그렇게 지금 지원하는 회사를 가고 싶었으면 밤을 새서라도 이력서를 냈어야 할 터인데, 그냥 잠을 쳐자버려서 결국 회사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이력서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 만들어져 버렸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만든 내가 싫으니 핑계대는 것 같다는 자괴감 같은 것도 느꼈다. 비율의 차이겠지만 둘 다 맞는 말 같다.


이런 상황이 이번 처음은 아니라서 ‘어쩌다 이렇게 됐지’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 회피의 기저에 깔린 감정에는 불만과 불안함이 있다. 지금 있는 곳은 여러 모로 마음에 안 들고, 큰 회사에 가야 좋아 보일 것 같은데 합격할 자신은 없고, 당연히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집중력과 책임감은 줄어들고, 다시 업무에 대한 자신감은 사라지고, 업무 성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으레 걱정이 늘어나고, 이 와중에 (내 기준) 성공러들은 마냥 멋져 보이고, 성공러들이 누리는 것들을 나도 누려보고 싶은데 나는 능력이 없고, 능력이 없으면 키워야 하는데 귀찮은 건 그렇다치고 나는 가망성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이 생각들이 얽히고 섞여서 결국 큰 무기력이 된다. 무기력이 나를 뒤덮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 밖에 없다.


다시 읽어보니 누구에게 말할 수 없을만큼 창피하고 한심한데,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아아


그리고 불안함이 만든 또 하나의 문제는, 자주 ‘눈이 돌아가게 되면서 점점 우유부단해진다는’는 것이다.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이고, 내가 하는 거 빼고 다 좋아 보이니까 자꾸 슬쩍 슬쩍 발만 걸치려고 든다. 세상의 좋은 직장은 무수히 많겠지만, 내가 그 모든 직장에 지원하기란 불가능하다. 근데 불안하니까 자꾸 고민이 늘어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아쉬운 것 같아서 집중력이 떨어진다.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선택하기 어렵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지금 내가 그렇다.  


내겐 이게 맞는 것 같아,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어째서 배터리가 이것밖에 남지 않은 것이지? 퇴고한답시고 집에 가면 또 한 일주일 뒤에나 들여다볼 것 같으니 빠르게 마무리 해야겠다.


결론적으로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지?’에 대한 답은, 구직을 멈출 생각은 없다. 나는 지금보다 확실한 목표를 가진 조직에서 성과를 내며 성장하고 싶으니까.(+그리고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싶다,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할 수도. 왜냐면 내년에 새 로드바이크를 마련하고 싶으니까) 그런 회사를 만날 기회를 계속 찾을 거고, 지원할 것이다. 당연히 지금 하는 일도 더 열심히 할 거다. 어쨋든 업무적으로 인정받고 싶으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맡은 업무를 더 잘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 시스템 안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지 고민할 예정이다. 그래서 이젠 지금 회사와 자잘하게 비슷한 회사들엔 지원하지 않을 예정이다. 거기 가서도 똑같은 고민을 다시 할테고, 또 다시 불안해질 테니까. 지금 하는 고민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거라면, 지금 회사의 일을 더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 편이 낫다.


다시 읽어보니 너무 당연한 말인가? 근데도 이 당연함을 알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정을 하기 전 너무 많은 시간을 고민에 쏟았으니까. 그래서 요즘엔 생각이 더 많아지기 전 1초라도 더 빨리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행해야 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이 글도 그냥 퇴고 없이 내보내버린다! 으아아아!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느리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잘 해내지도 못한다. 고민을 하다보면 무기력해지는 사람이다. 새삼 새로운 사실도 아닌데 적고 나닌 어쩐지 정말 그렇다. 그래도 타이밍을 잘 맞추면 좋은 결과가 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 맞는 리듬과 속도와 박자와 멜로디가 있다고 믿고 그것들을 잘 조합해보고 싶다. 언젠가 아주 듣기 좋은 노래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


자소ㅅㅓ 쓰기 너무 싫은 사람 하나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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