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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함에 대한 어떤 것

‘등산하기’와 ‘쉬지 않고 등산하기’의 차이

며칠 전 지인과 전화를 하며 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지인이 아주 평온한 톤으로 “제가 이력서에 ‘쉬지 않고 등산하기’라고 썼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말이 아주 재미있고 기발하다고 생각했다(물론 전적으로 내 기준). 그냥 등산이 아니라 쉬지 않고 등산하기라니! 어쩐지 동네 산 좀 탄다는 취준생들이 한번쯤 특기란에 써넣었을 듯한(나 역시 그런 적 있음) 평범한 특기가 궁금증을 자아내는 재미난 소재로 바뀌었다. 실제로 지인은 1차, 2차 면접에서 모두 등산하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 말이 너무 웃겨서 나는 “대체 쉬지 않고 등산한다는 게 뭐에요?”라고 물었다. 지인 피셜, 그건 말 그대로 쉬지 않는다는 뜻인데,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등산 하는 중간에 쉬어버리면 오히려 더 힘들어서 아주 느린 속도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 동네 등산 한정이지만, 산은 산이니까.


그리고 면접관들도 지인의 특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두 그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특히 2차 면접에서 회사 대표가 지인이 PT발표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등산을 좋아한다지요?”라고 물었단다. 1차 면접에서는 “쉬지 않고 등산한다는 게 뭐죠? 끈기가 있다는 뜻인가?”라고 물었다고 했다. 충분히 끈기나 꾸준한 성실함 등으로 어필할만한 특기로 보이긴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말 쉬지 않고 올라가기 때문에 오히려  천천히 걸어서 같이 가는 친구들보다 느리다는 것이 함정. 그말도 웃겼다.


나는 이 재미짐을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하게 ‘센스 있다’, ‘신선하다’, ‘창의력 있다’ 정도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쉬지 않고’라는 표현 하나만으로, 지인의 등산은 그냥 등산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걷는(속도와는 별개로) 등산의 현장’이 됐으니까. 등산은 원래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것으로 완성되는 과정이다. 오르막도 있고 험한길도 있으니 보통 반드시 쉬기 마련인데, 지인은 ‘쉬지 않았고’ 그래서 그 등산은 진짜 ‘특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듣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것에 대해 궁금증을 만들어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차별화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뭐 창의력을 기르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책 같은데서 많이 나오는 말 같은 거 있잖아. 사실 무에서 만들어진 유는 없고, 조금 다른 관점에서 유를 바라보는 게 창의력이고 차별화고 개성이고 센스고 그렇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나도 이런 기발함을, 센스를, 재미를,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일들을 하며 힘들었던 이유는 재미가 없었거든. 물론 그것은 나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재미없게 했으니까 재미없었겠지. 소심한 변명을 하자면, 그곳에선 내 유머감각을 발휘할 틈도, 발휘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도 없었다. 내가 나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나는 좀 재밌는 사람’인데, 저번 회사에서 내가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는 “좀 웃어라”, “원래 표정이 없냐” 등등의 말이었다. 물론 우울증을 거치고 난 뒤 나는 예전에 마냥 재밌던 사람에서 ‘그저 그렇게’ 재밌는 사람으로 발전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곳은 재미없는 곳이었다. 앗, 또 다시 안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이건 여기까지.


어쨋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다르게 보이려고, 더 나아 보이려고 발버둥치는 와중이라 ‘기발함’에 목매여 있었다. ‘내게는 대체 창의력이라는 것이 없는 건가’하며 90년대 주입식 교육을 원망하기도 했다. 아아, 이런 못난 모습이라니. 사실 난 미국인이었어도 진부하고 고루했을 거야. 그나마 다행인 건, 주위에 이토록 센스 있는 사람이 있어 ‘아, 이런 게 센스였지’라고 깨달을 수 있다는 거다. 항상 감사한다. 오늘은 특별히 ‘쉬지 않고 등산하기’가 특기인 지인에게 감사하다. 글까지 쓰고 싶을 정도로 신선하고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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