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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에 대한 어떤 것

죽어버린 뇌세포들을 추모하다 책 추천으로 끝나는 글

언젠가 우울증에 걸린 뇌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보통의 상태라면 전체적으로 뇌가 하얘야 하는데, 사진 속 뇌는 어두운 부분이 많았다. 우울증에 걸리면 어쩌구 저쩌구 해서 뇌세포가 죽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언젠가 봤던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읽은 책 몇 권 되지도 않는데 대체 왜 기억이 잘 안나는 것인지...?) 역시나 어떤 식으로 뇌세포가 죽는다는 말.


책을 보기 전에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책을 보고 나니 ‘내가 멍청해진 이유가 정말로 이때문이었군!’이라고 납득하게 됐다. 실제로 이전보다 책 읽는 속도가 느려졌고, 어떤 아이디어나 연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심할 땐 미세먼지 가득 낀 길가에 서 있는 것처럼 머리 속이 답답해서 뇌를 꺼내 씻고 싶을 정도였다. 따듯한 물에 좀 불린 다음에 수세미로 빢빡. 상상하니 좀 징그럽네...


내 상태도 이런데 사회 분위기도 ‘이 시국’ 인지라 왠지 모를 우울감이 더해졌다. 없던 공포와 혐오가 생겨날 정도다. 공포와 혐오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불안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피곤하다. 누구를 볼 때마다 ‘혹시 저 사람도?’라는 생각을 하고 싫어하는 건 정말 정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나한텐. 게다가 지금의 나는 외부의 고통에 조금 취약한 상태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이젠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 없어졌다. 바이러스는 퍼져가고, 소설에도 안 나올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진심으로, n번방 쓰레기들 다 죽이면 안되나? 지구에 사람도 많은데). 나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적어도 몸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게 내 일이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만 했는데도 머리가 아파온다. 아, 작업하기 싫어서 브런치 쓰는 건데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야.


ㅐ여튼 그래서 내가 요즘 하는 일은 예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는 것이다. 뭐 글쓰는 법, 일 잘하는 법 등등의 ‘생산적인 글’(정말 이 세상에 생산적인 글이라는 게 있을까)은 아니고 철학 해설서(인문교양?)나 SF소설을 주로 읽는다. ‘대체 인간은 정말 도대체 왜 이따구인가?’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우주처럼 낯선 곳에서 아동바동 살아가는 인간을 상상하면 그나마 인류애가 좀 더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다. 물론 후자는 좀 뻥이고, 그냥 재밌어서 읽는다.


소설을 보다보면 지극히 내 기준에서 지극히 별로인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특히 아직 SF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 아니라 안전하게 상 탔다는 작품을 본 건데, 뭔 시덥잖은 중2병(이 단어를 싫어하지만 정말 이게 딱이야) 걸린 캐릭터가 ‘시크한 척’ ‘세상을 달관한 척’하는 이야기였다. 웃긴 건, 우주를 다녀와서 인기와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주인공이 내내 대중을 모두 우매한 백성보듯 깔본다는 거다.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니 그렇게 싫으면 그만두시지 그러셨어요? 거기에 처음에 자신을 싫어하던 여자 연예인 캐릭터는 나중에 주인공을 좋아하게 된다. 그야말로 돈, 명예, 사랑 다 가졌지만 마음이 공허한 주인공인데, 그냥 거지같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별로야. 꼴같잖아. 그래서 화가 난다. 전자책으로 봐서 돈이 아깝진 않다. 그래서 화가 난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을 싫어해서 그런가?도 싶지만, 그걸 감안해도 별로야. 거지같애.


우울은 회피를 동반한다. 우울함에 잠식당한 뇌세포으로는 위의 상황더럼  이상의 깊은 생각을 이어나갈  없다. 내가 왜 뭘 싫어하고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진짜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그러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내가 싫어하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정말 이 세상에 생산적인 글이라는 게 있을까’ 따위로 평가질밖에 못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또다시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나를 바라보는 내가 너무 많아서 한심이 쌓여가는 느낌이다. 마치 예전에 살았던 집의 엘리베이터 안의 마주본 벽에 거울이 달려있어 그 속에 끝없이 내가 있는 것처럼. 지금의 내 모습을 보는 또 다른 내가 있고, 그걸 다시 바라보는 내가 있고, 또 내가 있고 평가의 평가가 이어지는 것. 자아가 증식되는 느낌? 까딱하면 다시 상담소 날짜 잡아야 할지도. ㅎㄷㄸ


그럼에도 희망적인 건, 어쨋든 안 좋은 상태인 걸 아니까 우울에 널부러져 있으면서도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비록 이력서 쓰기 싫어서 브런치를 쓰고 있지만, 침대에 마냥 누워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물론 어제랑 그제 이틀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지만. 여튼 그래서 독서는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 진지하고 다채롭운 인간의 이야기들. 때론 별 거지같은 이야기도 옳다. 적어도 생각을 하게 해주니까.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어느샌가 현실을 마주할 용기도 생긴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생각하기도 귀찮지만 어쨋든 진짜 그렇다. 이것도 나중에 누가 기사나 책으로 좀 전해줬으면 좋겠다. 이미 있으려나.


이 시국을 맞이하며 생각났던 책 중 하나는 존C.머터의 <재난 불평등(왜 재난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가혹할까)>. 코로나19로 세계 각 국에서 도시 봉쇄령이 내려지는 가운데 뉴욕에서 부자들은 이미 다 안전한 곳으로 떠나고 그 안에 남은 중산층이하의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특히 더 떠올랐다. 아이티 대지진, 미얀마 사이클론, 뉴올리언스 허리케인까지 많은 사상자를 냈던 대재난 당시의 상황과 이후의 일들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마치 사람처럼 사회도 큰 재난을 만났을 때 그 사회가 가진 병폐와 문제가 드러난다. 재난을 대응하는 방식(특히 권력층)부터 이후의 혼란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과학적인 얘기도 나오는데 어려워서 대충 봤다. 그래도 괜찮은듯.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여자들에 대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n번방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남녀 간 불평등 나아가 그 어떤 차별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사실 그동안 알고 있었는데도 겨우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쳐다보기만 해도 고통스럽고, 지난하고, 당장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니까. 지금은 대단하게 활동할만한 위인이 못 되기에 책을 읽고 생각을 쌓아나가기로 했다.


역시 인간으로 사는 건 너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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