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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희 Jan 24. 2021

03. 해프닝

인중 언니는 그날도 어김없이 인중 털을 뽑고는 성경모임에 나갔고, 나와 페페만이 가볍게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페페는 나의 생각보다 더 강인한 여성 같았다. 금감원 사건으로 조금 위축되었지만 금세 기운을 차리고, 자신의 실수를 반성했다. 나는 그런 페페의 모습에 반했고, 고민이 있을 때마다 페페에게 털어놓고는 했다. 페페는 적당한 유머와 함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해 적절한 피드백을 해주었다.
당시에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매우 좋지 못해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 밤거리를 헤매는 일이 잦았다. 뒤틀린 부녀지간의 앙금은 서로를 끊임없이 생채기 내었고, 상처 난 마음이 아파 각자의 방에서 끙끙거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느 기분 좋은 오후였던 것 같다. 엄마는 요리를 했고, 택시 기사였던 아빠는 오후 출근 준비를 했다. 가난했고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가 더 많았지만 이 정도 평화로움이면 살만하다고 느꼈던 나는 그때 막 고등학교 입학한 평범한 소녀였다. 출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현관에 나가 웃으며 배웅을 했다. 시간이 흘렀고, 밤이 되어 기분 좋은 잠을 청했다. 새벽까지 운전하는 아버지는 피곤하겠지만 따뜻한 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잠을 청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나른한 잠에 취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었던 거 같다. 멀리서 들리는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가 났다.
“으으으으”
이게 무슨 소리지. 어둠 속에서 한줄기의 빛이라도 찾으려고 눈알을 굴렸다.
“흐흐흐흐”
귀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흐흐흐흑.
동공이 커지는데 시간이 들었지만 이내 나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고, 좁은 내방의 풍경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 귀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흐느껴 우는 소리는 더욱 또렷해졌다. 귀신의 소리가 아니구나. 이건 누군가가 우는 소리구나.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의 아버지구나. 하...
거실로 나가자 화장실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술에 잔뜩 취해 팬티바람으로 변기를 잡고 구역질을 하며 통곡을 하며 울고 있는 나의 아버지가 있었다.
“나 죽을 거야. 죽고 싶어. 죽어 버릴 거야. 흐흐흐흑.”
평생의 가난과 고된 노동으로 관절염이 심한 어머니는 절뚝거리며 나와 그런 아버지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아버지를 책망하며 살았지만 그런 아버지를 감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생계를 혼자서 해결하는 강인함과 남편 없이 사는 삶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을 동시에 가진 여자였다.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온 아버지가 한 행동은 실실 웃는 것이었다. 실실실. 실실실. 웃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실실실 실실실 웃기 시작했다.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구나. 이것이 내 현실이구나. 나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렇구나.’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어머니가 마련한 이부자리 속으로 돌잡이 아기처럼 기어들어갔고 이날의 해프닝은 아버지의 여자 문제였던 걸로 밝혀졌다. 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부모의 사생활을 거침없이 알게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곤 했다. 그들의 삶의 궤적이 나의 궤적과 겹쳐질때마나 나는 아프고 가슴이 쓰라렸다.

가난한 집의 맞이로 태어난 아버지는 언제나 그것으로부터 시작해 더 배우지 못한 한, 어린 나이부터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는 억울함을 술로 풀고는 했다.
“아빠는 오래 살지 않을 거다. 아빠는 일찍 죽을 거다.”
술을 먹으면 누구 보란 듯이 주억거리는 아버지의 문장들 속에서 어린 나는 멋모르는 살의를 느끼곤 했다.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쓴 문자를 어디론가로 날려버리곤 했다. 그래야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조금이나마 사그라들곤 했다.
“세상에 많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믿을 수가 없어. 내 현실이. 이게 현실 부정이란 건가?”
“그럴지도.”
“나는 중세 유럽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어. 그곳에서 백작의 딸이고 싶어. 상대적인 빈곤감만 느끼고 살았는데 상대적인 풍요로움이 어떤 건지 한번 느껴보고 싶어.”
“그것도 재밌겠다.”
사회적 정의와 역사적 성취를 무시하는 듯한 내 발언에도 페페는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동조해주곤 했다. 그것이 위안이 돼 그녀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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