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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희 Feb 02. 2021

04. 이민

그녀의 결혼식은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객을 실은 대절 버스가 대략 5시간을 달려 결혼식장에 나를 내려주었고, 신부 대기실에서 나는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식장에서 그녀는 친구들로 둘러싸여 행복한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 잠을 한 숨도 못 자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살포시 내린 면사포 안에서 첩첩 거리며 씹는 껌은 그마저도 침이 모자라 입속에 쩍쩍 달라붙는 소리를 내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언발란스한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특별한 날마저도 거침없는 그녀의 성격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나는 페페말고는 아는 지인이 없어 혼자서 서있다가 친구들의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어색하게 단상에 올라갔다. 혼밥이 흔치 않은 시절이기도 했고, 결혼식장에서 혼밥을 하기 싫어 식사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서울에서 부산, 다시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여정이 빈속이라면 끔찍할 것 같아 망설이고 있던 차에, 페페는 역시 혼자 온 그녀의 친구 한 명을 소개해 주었다. 다행히 그녀의 친구와 함께 초밥을 실컷 먹고 서울행 대절 버스를 탔고, 페페의 결혼식은 그렇게 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페페만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페페는 결혼 초부터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과 치열한 전쟁 같은 부부싸움을 치른 날이면 어김없이 나에게 전화가 왔다. 페페가 막 낳은 어린 아들 역시 그들의 전쟁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부부의 육아는 화합하지 못했고, 서로가 더 노력하고 있음을 주장하기만 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페페는 하나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치러 나가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쉽게 지나가지 못하고 모든 것이 문제로 불거졌고 그것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결혼도, 육아도, 아기를 봐주기 위해 함께 살고 있는 유방암에 걸린 친정엄마와의 문제도 그랬다. 나는 일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남자 친구와 있다가도 페페의 전화가 오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함께 슬퍼하거나, 함께 분노했다. 그러다가도 다음날 다시 전화가 와 남편과 화해를 잘했다면서 페페는 이렇게 묻곤 했다.
“내가 쓰레기 같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페페가 행복하면 된 거야.”
지지고 볶고 싸우고 욕하고 이혼한다고 큰소리치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페가 행복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했다. 페페는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를 어렵사리 만들어가고 있었다. 페페의 아들이 5살 무렵쯤이 되자 페페가 꾸린 가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페페는 새로운 사업을 하게 되었다.

페페가 망원동에 자리를 튼 사업은 난과 다육식물을 전문으로 파는 작은 꽃집이었다. 크지 않은 사각형 공간에 선반을 짜 넣고 선반마다 알알이 예쁜 다육식물들이 채워졌다. 모퉁이에는 서양난과 동양란이 자리를 잡았고 중앙에는 꽃꽂이 원데이 클래스 용도로 큰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페페가 만든 호접란은 특히 인기가 좋았다. 아기자기한 계절꽃보다는 호접란이 선이 굵은 페페의 성격과 잘 맞아 다 만들어졌을 때 모양이 군더더기가 없고 시원시원했다. 성큼성큼 큰 꽃대를 심고 색색의 모래를 얹어 고급스럽고 산뜻한 호접란이 그녀의 손에서는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페페가 뚝딱거리며 사업의 모든 것을 완성할 즈음 가게 문 앞에 자주 주차를 해놓는 오토바이 배달맨과 페페의 말다툼이 생겼다. 페페는 지켜볼 수 없다며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세월의 상흔이 깊게 파인 배달맨의 거친 얼굴에도 페페는 거침없이 가게 앞에 주차를 하면 어쩌냐며 따졌다. 배달맨도 뭘 자꾸 주차했느냐고 으르렁거리는 통에 말싸움이 크게 번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페페와 배달맨을 달래며 양쪽에서 밀고 당기기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그냥 가세요. 그냥 가세요.”
배달맨은 페페의 당찬 기세에 밀려 내 만류에 못 이긴 척 오토바이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하는 거야. 넌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페페는 말했다.
내가 싸움을 쉽게 일단락시키려고 했던 말이 페페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페페는 그 뒤로도 서너 시간을 씩씩 거렸다. 물론 그 뒤로 페페의 가게 앞을 가로막으며 주차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페는 사업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페페의 꽃집이 그렇게 완성되어갔다. 나는 일주일에 다섯 번은 꽃집에 가서 페페와 꽃을 심기도 하고, 페페가 없는 동안 가게를 보며 일손을 도왔다.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이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꽃집에 손을 보태기 위해 일찍부터 망원동에 출근 도장을 찍었고, 대량 주문이 들어온 날 페페와 밤늦게 까지 꽃을 꽂았다. 그러다가도 일찍 문을 닫고 맥주를 먹으며 울고 웃으며 흘러가는 젊음을 즐겼다.
그 사이 나는 취업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다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다 중소기업에도 원서를 내었고 어느 때에는 서류에서 낙방하고 어느 때에는 필기에서 낙방했다. 또 어느 때에는 면접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페페의 꽃집에서 나의 실패를 주억거리며 세상을 탓하거나 부모를 탓했다. 어리석은 나 자신을 폄하하는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를 페페와 페페의 꽃집에서 보냈다.
망원동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페페의 꽃집이 문을 닫은 것은 페페가 말레이시아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페페는 가족 모두와 함께 말레이시아로 이민을 떠나며 나에게 정리가 되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육 개월 뒤 페페는 이민에 실패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지만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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