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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희 Aug 15. 2020

03. 우야꼬 여사의 음모

결혼식날

“엄마, 엄마 진짜 이건 너무 하는 거 아이가?”
“아이고 우야꼬, 내가 잘못했는갑다. 이를 우야꼬, 우야꼬..”
4월의 봄, 하늘은 그려놓은 것처럼 화창했고 인터넷에서 사 입은 웨딩드레스 속 등줄기에서 나는 뜨거운 땀방울을 느낀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아는 우야꼬 여사님은 평생을 대구에서 사셨다. 평생 한 지역에서 사신 분들의 억양 높낮이나 발음의 평균치를 내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아는 우야꼬 여사님의 억양은 그야말로 드세었고 억세었고 굳세었다. 그러하니 나는 우야꼬 여사님 앞에서 방금 전 두 귀로 들은 얘기를 못 알아들어도 그저 배시시 웃는 순둥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야꼬 여사님은 언제나 유쾌하고 밝았다. 둘째 아들 내외와 함께 드라이브를 할 때면 세상 굳센 발음으로 사랑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우야꼬, 내 사랑이~” 그러다 흥이 더 오르면 갑자기 어깨춤을 덩실거리며 추기도 했는데 차 안에서 춤을 출 때는 나 역시 즐거운 마음에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여사님의 흥 타임이 도래할 때면 나는 두어 걸음 뒤에서 숨을 골라야 했다. 가장 난감할때는 저 멀리서 부터 나를 보고 춤을 추며 다가올때였는데 마치 삼바미녀가 된듯한 몸사위로 그녀는 나를 향한 환희를 표현하곤 하였다. 그렇게 흥이 넘치다가도 뭔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여사님은 손으로 누른 젤리 꿈틀이처럼 쭈그려 들고는 “아이고,, 그럼 우야꼬..”라고 했다.

나와 봉봉이의 결혼식은 춘천에 있는 카페에서 열린 작은 결혼식이었다. 카페를 빌렸고 꾸몄고 음식을 세팅했다.  결혼식 스드메를 포함한 모든 것을 연결된 업체나 도우미 아주머니 없이 일이 바쁜 봉봉이를 대신해 혼자서 알아보고 해결해나갔다. 마침내 결혼식 날 새벽에 일어나 직접 예약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방산시장에서 직접 산 단발머리에 어울리는 헤어핀을 달았다. 결혼식 전날 밤 코스트코에서 산 쿠키들로 만든 답례품 운반은 친언니들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미리 주문한 부케는 미용실에 잘 도착해 있었고, 이만 오천 원 주고 산 하얀색 구두는 벗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밴드를 둘렀다. 강남에서 춘천까지의 운전은 봉봉이가 맡았다. 봉봉이의 턱시도 색은 역시 직접 고른 거라 그런지 봉봉이의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느낌에 마음에 들었다.
하객 수를 조절해야 하는 것은 스몰웨딩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라 미안하고 겸연쩍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객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 직계가족만을 초대하기로 했고, 친구들은 정말 꼭 초대해야 하는 사람만을 초대하기로 했다. 작은 결혼식의 가장 큰 난관이 카페의 수용인원에 맞춰 하객을 초대하는 일이라는 것, 결혼 전에는 이 일이 그렇게 곤란하고 진땀 나는 일이란 것을 진심으로 1도 몰랐다. 일반적인 웨딩홀은 부부 찍어내는 공장이라는 악명을 떨칠 정도로 많은 수의 커플들이 그날 하루에 순차적으로 부부가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규칙이 있었고 규칙을 준수시키는 도우미들이 상주했고, 그들의 통솔 아래 번잡하지만 안정된 식이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몰웨딩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반대 일 수 있었다. 여유 있을 수 있었고, 다급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생각엔 그랬다. 그리고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그렇게 나와 봉봉이 그리고 엄마는 강남의 미용실을 출발해 춘천의 웨딩이 열릴 카페에 도착했고 이제 막 차에서 내려 정원에 들어선 차였다.

난장판이었다. 왜지? 왜 이렇게 난장이지? 그곳에는 규칙이란 게 없었다. 전주에서 오신 작은 아버지들과 고모들이 자리를 못잡고 정원 가장자리 나무 밑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둘째 언니는 다가와서 그런데 쿠키 답례품은 지금 주는 건지, 식이 다 끝나고 주는 건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얼굴을 모르겠는 사람들이 이미 다 가지고 갔다고 덧붙였다. 다급함이 느껴졌다. 서울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온 친구들은 몇은 웃으며 축하를 해주었고, 몇은 너무 멀었다며 투덜거렸다. 쟤네는 초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내가 모르는 얼굴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까지 모르는 얼굴이 많을 이유가 없는데. 아빠의 형제분들이야 내가 모를 리 없고, 하객 수를 소수로 맞춰야 했기에 사촌들도 초대하지 않은 터였다. 봉봉이 부모님의 형제분들의 수는 이미 계산에 넣어 놨고 내 친구와 봉봉이 친구야 이미 알거나 사진으로 봤거나, 그렇지 않은 인원은 매우 소수였다. 그러면 수십 명에 달하는 낯선 이는 누구일까? 누가 내 결혼식에 온 거지? 지나가는 사람이 밥 먹으러 온건가? 양복 입었는데? 저렇게 당당한데? 양복 입고 당당하게 마련한 테이블을 선점하고 앉아 있는데?
그때 봉봉이가 작은 소리로 하는 말이 들렸다.

“엄마, 진짜 너무하는 거 아이가. 아니 소수로만 불러야 한다카지 않았나? 이렇게 다 모시고 오면 우야노”
“아이고 그르나? 온다카는데 우야노. 우야꼬. 내가 망친기가. 우야꼬. 우야꼬”
“아이참, 엄마도 내가 몇 번을 말했다 아이가. 여여네 하객은 앉을자리도 없다 아이가.”

봉봉이는 처음은 분명 낮고 조용한 어조였는데 어느덧 가슴을 치는 하이톤의 하소연으로 그럴 수 밖에 없었는데 뭐 어쩌겠느냐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젤리 꿈틀이를 대면하고 있었다.
“우야꼬. 그러면 온다카는데 우야꼬”
분명히 우야꼬 여사님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작은 결혼식의 특성을 잘 알아들었다며 그러마하고 굳센 억양 드높였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연로한 나이의 고모를 포함한 작은 아버지들은 서서 결혼식을 구경해야 했다. 앉을자리가 모자라니 서서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자꾸 무언가가 넘어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가 신부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된다 했던가. 나는 13센티 구두를 신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오가면서 물을 얻어마셨다. 목이탔다.

지금 돌아보면 우야꼬 여사님 덕분에 내 작은 결혼식일 뻔했던 큰 결혼식은 북적거리면서도 활기차게 잘 치러진 것을 안다.  친구들은 이렇게 날씨 좋은날 이렇게 활기찬 신부는 처음 봤다며 결혼 생각이 없던 친구도 내 결혼식을 보고는 결혼을 하고 싶어 졌다고 하니 분명 잘 지나간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
다만 누가 다시 한번 더 이런 걸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일이 많이 틀어져 두 번 결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그냥 살면 살았지 결혼’식’은 두 번 다시 안 하겠노라고 손사래를 쳤다는 것이 조금 도드라진 후일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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