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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희 Aug 22. 2020

04. 첫인상 좋다고 다 쓸만한 건 아니다.

나의 라임 신혼집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신혼부부가 신혼부부가 되지 못하는 이유의 가장 일 순위가 집을 구하기 어려워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디든 우리가 살 곳이 있다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우리가 살게 될 집은 대구의 변두리에 있는 5층짜리 3개 동의 맨션이었다. 예전에 사용하다 사라진 용어인 줄 알았던 ‘맨션’이라는 단어가 대구에서는 아직 흔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운치 있었다.
개나리 맨션.
도색이 거의 벗겨진 건물 외벽에 희미하게 노란 개나리 무늬 형태를 볼 수 있는 작은 맨션이었다. 아래쪽에는 명조체의 개나리 맨션이라는 이름이 박혀있었다. 레트로풍이네.
내가 들어갈 곳은 가동, 나동, 다동 중 나동이었다.  
4월, 처음 맨션에 도착했을 때 이 작은 맨션의 앞마당엔 보라색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안 그래도 4월의 봄 향기가 그득한 마당에 라일락 향기가 더해져 개나리맨션이 아니라 낭만 맨션이라 하면 그만 일 듯 싶었다. 라일락 나무와 집 없는 길고양이 한 마리 조차 너무 이뻐 이곳이 마치 일본 여행 때 보았던 참 예뻤던 작은 골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개나리 맨션은 사실 40년이 넘은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신혼집은 5층이었다.
‘40년이라면 나보다 언니 혹은 오빠로구나. 나도 이제 허리가 저린 나인데 너도 참 오래 버틴 아이로구나’ 층고가 높은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우야꼬 여사님은 30년 전에 이 집을 샀다 했다.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살자 싶어 구매한 이곳이 그 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건축이 안되고 조용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셨다. 그 조차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나는 그래도 신혼집부터 남의 집을 전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무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고난의 개나리맨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개나리 맨션은 외관만 낡은 것이 아니었다. 30년 동안 한 번도 수리된 적이 없는 나의 라임 신혼집은 집안의 기둥은 모두 틈이 벌어져 개미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보일러는 붙여진 스티커의 날짜를 보니 2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온수를 누르기라도 하면 보일러는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아아아. 나 아프다, 이놈들아. 나 좀 그만 쉬게 해 줘라. 끼야아아아아” 그나마도 이내 고장이 나버려 비명은 지르되 온수를 내보내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결혼 초반 한 직업에 정착하지 못했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의 관건은 생활비를 극도로 아끼는 것이었으므로 보일러를 바꿀 용기를 쉽게 내지 못한 채 우리는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감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아이고 야야, 안 그래도 전에 세입자가 보일라가 깜박깜박 안된다 카긴 카든데~ 우야꼬~”
오마깟! 우야꼬 여사님의 ‘우야꼬’라는 단어는 안 들어야 좋은 상황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러던 중 방이 냉골이 되었다. 온수를 내지 못하면 방이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수리기사 아저씨는 배관이 막힌 것인 문제라면 보일러를 교체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배관을 확인해봐야 한다고 했다.
‘배관에 문제가 있다면 이 짐들을 다 어디다 두고 공사를 해야 하나..’ 아찔했다.
출장을 나오기 전에 분배기를 찾아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는 아저씨의 말에 나는 보통의 경우 집의 어디에 분배기가 있는지를 물어물어 어렵사리 안방(!)에서 분배기를 찾아내었다. 40살 개나리 맨션은 요즘의 집들처럼 분배기가 한 곳에 있지 않고 각 방마다 있는 매우 독특한 아이였다.
분배기를 여는 문은 녹이 슬어 있었다. 거미줄이 쳐있어 마침 옆에 있던 휴지심으로 거미줄을 헤쳤다.
끼익.
마치 유물을 발굴하는 느낌으로 분배기 통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마치, 표현하자면 마치, 구한말에 일본 놈들이 만들어 놓고 버리고 갔을 법한 녹이 잔뜩 낀 밸브가 있었다.
와우!!
사진을 찍어 기사 아저씨에게 보내자 아저씨는 매우 심플하게 문자를 보내주었다. “이 밸브는 청소할 수 없습니다.”
와우!!!
난감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이 되니 나는 추워서 살기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도 다양한 종류의 바퀴들이 나왔다. 이름을 알 수 도 없고, 알아낼 수도 없는 바퀴들은 오싹한 자취를 남기며 어디론가를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꺄악!”
비명을 지르면 남편이 달려오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남편이 왔을 때는 이미 어딘가 끝을 알 순 없지만 시작은 이곳인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장마를 지나면서는 왜인지 검은색 거미들이 자주 출몰하곤 했다. 불을 켜면 ‘바 바박’하고 어딘가를 급히 가거나, 눈앞에서 늘어트린 줄을 줄여 천장으로 사라졌다. 한 번은 컵에 물을 따라먹는데 입에 머리카락의 느낌이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컵 속에서 새끼거미가 갈 곳을 못 찾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디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욕구는 어느새 깨끗하고 따뜻한 집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었다.
이토록 계절의 흐름이 두려울 수가 없었다.
5층 집, 한여름 대구의 찌는 듯한 더위라든가, 얼음 창고 같은 한겨울의 추위가 너무 두려워서 중간에 끼여 있는 따스한 봄바람, 향긋한 가을바람을 느낄 새가 없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앞마당의 라일락 나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타버리고 소나무가 들어앉았다. 나무가 타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동안 개나리 맨션을 제외한 골목 양쪽의 구가옥들은 거짓말이라도 하듯 동시에 재개발에 착수했다. 하루 종일 양쪽에서 뚱땅뚱땅, 쿵콰광거렸고 저녁이 되면 집을 잃고 몰려든 동네 고양이들이 울부짖곤 했다.
와아우..!
남편은 그런 때일수록 사랑한다고 했다. 남편 또한 예상치 못한 신혼집의 난관들로 쉽게 풀리지 않는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겠지. 서로 의지하는 수밖에는 돌파구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러기를 3년이 지났다.
나는 오늘도 낡은 우리 집을 쓸고 닦고 청소한다. 계절마다 커튼을 바꾸고, 레이스로 된 덮개를 소파에 얹었다. 민트색 시트지를 사서 안방의 한쪽 벽면만 붙여 포인트를 주었고, 남은 시트지를 싱크대 한쪽에 붙여 변화를 주었다. 거미가 주로 생기는 베란다 쪽은 청소를 더 열심히 했다. 남편이 사다준 드라이플라워에 향수를 뿌린 후 끈으로 잘 묶어 부엌 입구에 매달아 두었고, 선물 받은 원앙새가 달려있는 풍경을 현관문에 달아 띠링띠링 소리를 울리게 했다.
부모님의 집 한켠의 좁은 방이 아니라 나는 내 집을 가꾸며 살고 있다. 대구는 다행히 서울보다 미세먼지가 덜해 비염이 심한 나는 드디어 두 콧구멍을 이용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한 이 선택이 고난의 선택이 아니라 현명한 자립으로 가는 길의 한 발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청소기를 돌려보고 물걸레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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