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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Jun 26. 2024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잠자기 전 루틴이 생겼다. 작은 손톱에 알록달록 매니큐어 칠하기. 매니큐어. 내 화장대에는 없는 물건인데 아이 화장대에는 새로 생겼다. 어린이집에서 직업에 대해 배우는데 '네일 아티스트'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덕분에 낮에는 본업을 하고 밤에는 네일 아티스트로 변한다. 어린이용은 물에 쉽게 벗겨져서 반드시 목욕하고 머리카락을 다 말린 다음에 손톱에 칠해야 한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은 아침 햇살에 가장 예쁘게 빛난다. 덕분에 아이는 등원길에 기분이 샤랄라 하다.


아파트 담장에는 얼굴이 작은 붉은 여름 장미가 피었고 밝은 여름 햇살 아래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다. 빨간불로 바뀌기 전까지.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의 등원길과 내 출근길은 같다. 애는 2층 나는 5층. 우리는 사거리에서 기역자 또는 니은자로 신호등 두 개를 건너면 목적지에 도착이다. 첫 번째 신호등 파란불이 깜박이고 있을 무렵 나는 보도블록에 올라섰고 아이는 넘어졌다. 킥보드를 타고 건너다가 보도블록 턱에 걸려서 넘어진 거다. 신난 만큼 속도로.


일단 아이를 도로변에서 보도블록 안쪽으로 안아서 옮겼다. 아이는 16kg다, 갑자기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옆에 서있던 아저씨가 도로와 보도블록 사이에 넘어진 킥보드를 우리 쪽으로 끌고 왔다. 아이와 등원하던 할머니는 가방에서 밴드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함께 서있던 사람들이 아이에게 많이 아팠겠다는 위로의 말과 눈빛을 보내왔다. 아마 우렁찬 울음소리에 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거다. 아이는 언제나 아이답게 엉엉 울기 때문이다.


 조금 창피했다. 공공장소에서 내 아이가 크게 울었고 낯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서. 같은 이유로 곧바로 고마운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낯선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소박하고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 요시모토 바나나 <바다의 뚜껑>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사람들은 검은 땅에 하얀 줄이 그어진 단단한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진정한 아이는 킥보드를 씽씽 타고 길을 건넜다. 이번에는 안 넘어졌다는 뿌듯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쓱 올렸다. 젖은 얼굴에 촉촉한 눈망울이 반짝거렸고 킥보드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 손톱은 여전히 알록달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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