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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운 Sep 07. 2022

아름다운 조합, 산과 바다

산과 바다. 어디를 더 좋아해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처음 듣는 질문이 아닌데도, 들을 때마다 골머리를 앓는 질문들이 있어요. 두 선택지가 마음속에서 비슷한 자리를 나눠 가지고 손을 잡고 있거든요. 떼어놓아 줄을 세우려 하면 오래된 스티커처럼 떨어지지 않아요.


  나는 그런 질문이 몇 개 더 있어요. 한여름 냉면집에서 물냉면과 비빔냉면 사이에서 순식간에 깊은 고민에 빠져버려요. 새콤달콤한 물냉면 국물도 먹고 싶고 매콤짭짤한 비빔냉면 양념도 먹고 싶어서요. 냉면을 좋아하는 내게 둘은 너무나도 다르고 똑같이 좋아하는 음식이거든요. 그리고 봄과 가을. 좋아하는 계절을 대답할 때마다 새로 고민해야 합니다. 비슷한 온도의 계절이잖아요. 하지만 봄의 화사함과 가을의 차분함을 차별 없이 좋아해요.


  산과 바다,

  어디를 더 좋아해요?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는 유명한 산이 있었어요. 학창 시절 봄 소풍, 가을 소풍, 체험학습… 등등 이름은 달랐지만 장소는 늘 산이었어요. '또 산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 보니 산에 오르는 부담감은 작아졌고 자신감은 커졌죠. 자주 가다 보니 '갈 때마다 새로운 곳이 산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정말로 산은 갈 때마다 새로워요. 색깔과 냄새와 사람들. 한 철을 살면서도 성실하고 완벽하게 살아내는 풀들은 계절마다 산의 색깔 옷을 부지런히 갈아입혀요. 구석구석 내 시선이 머물기를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빼꼼 내미는 꽃들도 있고요. 달맞이꽃, 큰금계국, 벌개미취. 한겨울 앙상한 나뭇가지에 쌓인 새하얀 눈꽃까지. 풀과 흙이 한데 뒤섞인 냄새는 아마 산속만큼 진하게 나는 곳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요, 산은 시끄러워요.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가는 소리로요. 풀벌레 소리,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들이요. 소리로 채워진 산은 활기차요. 빨강 파랑 등산복을 입은 걸음이 씩씩한 사람들. 말하는 단어까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에너지는 내게 와닿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강렬한 색깔의 등산복을 입고 넉넉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곧 내게 거짓말을 할 거라는 사실이요. "10분만 가면 정상이야"라는 새빨간 거짓말. 산에 갈 때마다 속아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을 뚝뚝 흘리며 '또 속았어'라는 말을 스무 번쯤 내뱉다 보면 더 이상 오를 길이 없고 발아래 펼쳐진 세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등산복을 입고 배낭에 오독오독 씹어먹기 좋은 오이 몇 조각을 챙겨 넣고 등산 양말과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서는 모습부터 등산로 입구에서 경쾌하게 "출발!"을 외쳤던 가벼운 발걸음. 어느새 하하호호 웃음기 사라지고 땀의 짠맛만 느껴지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요. 수고했다 내게 불어오는 바람에 "야호!"라고 외치면 다시 "야호!"라고 돌아오는 메아리. 이 순간을 누리기 위해 걸어온 시간들을 마음껏 만끽해봅니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어디로 갈까?'라는 물음에 진한 초록색의 산도 좋지만 새파란 바다가 조금 더 생각났어요. '속초 바다로 가자!' 푸른 바다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햇볕에 달구어진 모래사장을 밟고 싶었거든요. 발가락 사이에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알을 쥐고 있다가 시원한 바닷물이 쓸어가 버리는 무용한 시간을 좋아해요.


  바다에 가는 건 해내야 하는 일처럼 부담스럽거나 싫었던 적이 없어요. 바다는 벅차지만 버겁지는 않아요.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지 않아도 되고요. 땀의 짠맛이 아닌 바다의 짠 내음을 느끼고 있으면 기분 좋은 나른함이 파도처럼 밀려와요. 몸과 마음이 평온해져요. 바다에 풍덩 뛰어들지 않아도 괜찮아요. 바짓단을 걷고 발목만 담근 채 걸어요. 그리고 따뜻한 모래사장에 앉아서 조각난 빛을 머금고 평온하게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아요.


  수면 아래 맨발바닥으로 영영 닿을 수 없는 바다의 바닥이 있어요. 낮은 산도 높은 산도 있지만 얕기만 한 바다는 없어요. 다른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은 모두 다른 산으로 느껴지지만 바다는 뭐라 부르든 같은 존재로 느껴져요. 바다는 바다. 어느 계절 어느 바다를 찾아도 같은 모습으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는 곳이죠.


  정상에 오르기는 버겁지만 성취감을 안겨주는 산.

  무용한 시간 속에서 여유와 평온이 밀려드는 바다.


  산과 바다. 여전히 선택하기 어렵지만 똑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곳이에요. '산과 바다. 어디로 갈까?'라는 물음에 매번 새로 고민하고 선택할 거예요. 나는 산과 바다를 골라가는 마음처럼 일상과 인생을 채워가고 싶어요. 성취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순간과 온전히 여유를 즐기는 평온한 순간의 아름다운 조합으로요. 자연처럼 자연스럽게요!





Photo by CK Ye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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