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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운 Jun 20. 2022

숨은 취향 찾기

숨어있는 나만의 취향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집 안이 고요하다. 나는 식탁에 홀로 앉아있다. 남편은 일터로, 아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갔다. 나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조용히 벗어놓았다. 그냥 ‘나’로 존재한다. 몸과 마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나는 '나' 답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한다. 닥치는 대로 소설책을 꺼내서 읽기도 한다. 마구잡이로 에세이를 읽기도 한다. 모자를 눌러쓰고 공원 산책을 하기도 한다. 그 무엇이든 좋다.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날도 있다. 머릿속이 텅 빈 날도 있다. 이 역시 좋다.


  요즘은 쓰는 일이 좋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식탁을 책상이라고 부른다. 평소 모아놓은 문구를 한 바구니에 담아서 책상으로 가져다 놓는다. 바구니에서 먼저 꺼내고, 가까이에 두는 것은 주간계획표와 샤프다. 내 샤프는 검은색 펜텔 120 A3DX 0.5mm다. 무게감은 적당하고, 두께는 얇실해서 잡고 쓰기 좋다. 샤프심은 HB만 쓴다. 내게 맞는 샤프를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학창 시절, 문구점을 지날 때는 발이 먼저 문구점으로 들어갔다. 필기구 코너에서 샤프와 펜을 써 보고, 연필을 구경했다. 연필은 HB, B, 2B, 4B를 썼고, 펜도 굵기별로 색깔별로 골라서 썼다. 모두 쓰는 느낌이 달랐다. 수 백 번의 연필과 펜을 골라 써 보고, 지금의 샤프를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문구점에 가더라도 여유롭게 둘러보고만 온다. 더는 필기구 유목민이 아니다.


  나는 검은색 펜텔 샤프로 주간계획표를 적는다. 구체적으로 꼼꼼히. 예를 들면, “저녁 메뉴는 도토리 묵무침”, “3시 반 하원 길에 마트에서 도토리 묵 사 오기”와 같다. 도토리 묵무침을 하려면, 주 재료인 도토리묵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 조차 적는 이유가 있다. 나는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고, 자잘하게 적는 것이 좋다. 세세하게 계획을 세우기 좋아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쓰는 행위 자체가 좋다. 종이에 샤프로 글자를 쓸 때, 사각사각 소리와 쓰는 느낌 말이다. 용건만 쓰기가 아쉬워서,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리고 밑줄도 여러 번 그어놓는다. 때로는 그 순간 떠오르는 단어들도 써 놓는다. 한 때는 쓰는 느낌이 좋아서 책을 필사해 보았다. 책을 모조리 적어야 한다는 목표만 보고 냅다 뛰었다. 내 손이 경주마가 된 느낌이었다. 힘주어 쓰는 습관 때문에 손목까지 아팠다. 나는 주간계획표를 쓰는, 그 정도가 딱 좋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나는 마음에 드는 샤프와 계획표를 갖게 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에 욕심나지 않는다. 세상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 어떤 것’을 찾아다닐 때는 마음이 조급했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서 옆에 두고 지내는 지금은 조급함 자리에 만족감이 들어왔다. 내 인생이란 퍼즐에서 중요한 한 조각을 맞춰 놓은 느낌이랄까. 퍼즐에서 중요한 한 조각을 맞추면, 자연스레 다른 조각들도 맞출 수 있다. 이처럼, 내게도 만족감을 채운 다음,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 디테일을 좁혀가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시간을 들여서 찾아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는 그게 바로 '나'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정보나 지식은 클릭 몇 번 혹은 반나절의 시간을 들이면 못 찾을 것이 없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나'만 알고 있다. 내가 모르는 '나'도 있다. 나의 건강 상태와 주변 환경은 계속 변한다. 그러면 '내가 아는 나'도 변한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나는 검은색 펜텔 샤프로 주간계획표 쓰는 것을 단순히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뭉뚱그려서 부르고 싶지 않다. 내 생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나만의 취향'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내 취향을 곁에 두고 보고 싶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이 내 마음에 드는 것들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하얀 스케치북에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그려서 근사한 그림책 한 권을 만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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