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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운 Jul 06. 2022

향기가 여행을 부를 때

새털 같이 가볍고 진한 향기 나는 여행 이야기

  나는 '여행'하면 조 말론 향수가 떠올라요. 특히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코롱' 향이요. 숲과 바다향이 느껴지고 상큼한 자몽향이 어우러진 향수예요. 여행을 떠나기보다 향수를 더 자주 맡게 되는 나는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 어려워요. 막상 떠나려고 짐을 챙기다 보면 집을 챙기게 되기도 해요. 어쩌면 나는 삶이 짐보다 무겁게 느껴질 때 여행을 떠나는지도 몰라요.


  여행은 낯선 곳에서 먹고 자고 쉬는 거죠. 나는 호텔이나 리조트 때로는 집 전체를 빌려 지내기도 해요. 체크인하고 문 앞에 서면 어떤 모습일지 잔뜩 기대가 돼요. 문을 벌컥 열면 눈보다 코가 먼저 숙소의 분위기를 느껴요. 꽃밭을 연상하게 하는 라벤더향, 풀밭을 연상하게 하는 피톤치드향. 방향제 냄새예요. 숙소마다 다른 종류지만 '진한 인공 향'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진한 향은 여행을 알리는 신호예요.


  손에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내 마음도 새털처럼 가벼워져요. 숙소는 집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에요. 사실 밥 냄새가 나는 집은 의무의 공간이죠.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창고와 옷장 정리 같은 묵은 숙제도 있죠. 한 지붕 아래 함께 산다는 이유로 가족끼리 할 일을 미루기도 하고 마구 시키기도 해요. 집은 안식의 공간이면서 일터이기도 하죠.


  반면 숙소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어요. 처음 들어 설 때도 외출하고 돌아올 때도, 단정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정리된 물건, 새하얀 침대 시트와 베개는 편안하게 느껴져요.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죠. 결국 나를 기다리던 모습으로 정리되고 말 테니까요. 여행은 의무감에서 해방되는 시간이에요. 낯선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먹고 자고 쉬는 시간이죠.


  여행지에서 같은 경험으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시간은 정말 특별해요. 지난여름 제주도에서 내 실수로 가족들을 땡볕에 서 있게 만든 일이 있었어요. 한여름의 햇볕은 피부를 따갑게 해 견디기 괴롭죠. 사실 나는 그보다 빨갛게 익은 가족들 얼굴 보기가 더 힘들었어요. 나 때문에 여행이 아니라 고행을 하는구나 싶었거든요. 저녁 시간에 나는 여행을 망쳐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남편은 천진하게 웃는 아이들을 여유롭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아이는 신기한 돌멩이 '현무암'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고 했어요. 막내는 그냥 웃고만 있고요. 누구 하나 나를 탓하지 않았어요. 가족은 나를 온전하게 품어주고 있었죠. 뜻하지 않은 사건이 '든든한 가족'의 존재를 알려줬어요. 낯선 곳에서 느낀 생생한 안정감이었어요.


  향기로 시작하는 여행은 의무감에서 벗어난 새털 같은 가벼움을 누리는 시간이에요. '가족'이라는 익숙한 관계에 '새로움'이라는 향을 뿌리기도 하고요. 어제 갔던 카페에는 탁자에 디퓨저가 놓여있었어요. 진한 장미향이었죠. 순식간에 새하얀 침대 시트와 베개가 떠올랐어요. 지금 당장 숙소를 검색해야겠네요. 향기는 여행을 부릅니다.





Photo by Gabriel Aleniu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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