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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다운 Jun 23. 2022

우연이라, 더 아름다운

역할이 갑갑하고 무거운 당신에게 보내는 쉼표 하나

  온기가 사라진 주방을 내려다본다. 조리대에는 식사 준비를 할 때 사용했던 칼과 도마. 그 옆 싱크대에는 우유에 불어난 시리얼이 담긴 그릇, 커피 자국으로 검은 테두리가 생긴 컵, 먹다 남은 방울토마토 몇 알, 흩뿌려져 있는 수박씨가 있다. 고개를 조금 돌려보면, 빨래통 가득 들어있는 수건과 옷가지들이 보이고, 층층이 쌓여있는 상자 옆으로 맥주 캔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것들이 바로 내가 오늘 할 일이다. 중요하고도 아주 급한 일. 저것들을 보고 있으면 깊은 곳에서 진한 짜증이 새어 나온다. 내가 하찮고 귀찮은 집안일을 하려고 치열하게 살았던가 싶어 진다. 딱히 귀하고 중요한 일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쉽지 않다. 바로 옆에 있는 설거지들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온다.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날카로워진 신경은 자꾸만 그쪽을 향한다.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는 딸, 아내, 엄마라는 역할에 피로감을 느낄 때다. 역할이 나를 점령한 것만 같다. 갑갑하고 무겁다. 어느 역할도 흔쾌히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엄마한테 안부 전화하기, 따뜻한 저녁식사 준비하기, 아이와 즐겁게 놀이하기와 같은 일들.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역할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서 '딸'이란 역할이 생겼고, 남편과 결혼해서 '아내'라는 역할이 생겼고, 아이들을 낳아서 '엄마'라는 역할이 생겼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가 생긴다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원인은 명확하고 결과는 당연해 보인다. 마치, 필연처럼.


  인생에서 크고 작은 시련을 만날 때마다 집요하게 인과관계를 따져보았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명백한 원인을 찾아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따져 묻기 위해서다. 내가 원인이라면 자책을 했고 남이 원인이라면 불 같이 분노하고 보상받기를 바랐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남편과 결혼했을까', '나는 왜 아이들을 낳았을까'.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나' 싶을 때마다 떠올린 질문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질문을 품고 살았지만 여전히 정답은 모른다. 대신 마음속에서 마법처럼 생겨난 대답은 있다.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마법 같은 단어다.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던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이 '우연'이라는 답을 만나면 다 풀리고 만다.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남편을 만나, 우연히 아이들을 낳았다. 우연한 상황에 나를 놓고 보면, 낭만적이고 감사하다. 우연히 태어났는데, 인생을 가꾸는 재미가 있다는 것. 우연히 결혼을 했는데,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은 사람과 했다는 것. 우연히 아이들을 낳았는데, 내가 아는 생물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난 것.


  살아가는 동안 무수한 사건은 항상 발생한다. 삶이 겉으로는 그럴듯한 원인과 결과로 보일지라도,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아무 개연성 없는 우연들이 겹쳐진 날의 연속일 수 있다. 우연은 좋은 일과 나쁜 일, 예외 없이 찾아온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작은 것들의 조합, 알기 힘든 원인을 찾기보다는 우연을 수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눈앞에 있는 일이 쉽고 가볍게 할 수 있는 집안일이라서 다행이다. 그릇들을 박박 닦아서 설거지하고, 층층이 쌓인 상자들과 널브러진 캔들을 분리배출하고, 눅눅한 빨래를 모조리 세탁기에 넣고 돌릴 것이다. 우연히 날씨도 빨래 널기 딱 좋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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