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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Jun 14. 2023

커다란 존재감을 품은 작은 사람


수요일은 그런 날이었다. 온종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지만 온몸이 지쳐버린 상태.

    논문을 찾고 읽고 개중에 몇 개는 발췌하고 요약하고, 다시 자료를 뒤지고 읽어내는 무한 반복. 6시 5분 퇴근시간을 알리는 사내 방송에 화들짝 놀라 급히 저녁밥을 배달 앱으로 고르고 주문하며 어린이집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생글생글 웃는 진이를 데리고 온이가 기다릴 집으로 향했다.

    온이는 집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고 진이도 함께 뛰어놀기 시작했다. 곧바로 우우웅 진동이 울렸고, 집에 안 계시는 거냐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 배달 기사님이었다. 한창 저녁 시간이라 바쁘실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놀고 싶다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지하주차장으로 뛰어가서 음식을 받아왔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보드라운 면티에 고무줄 파자마 바지로. 그사이 아이들은 소꿉놀이하듯 음식 포장을 풀고 식탁에 쌀국수, 분보싸오, 스프링롤을 차려 놓았다. 귀여운 작은 사람 둘.

    아이들 개인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나도 먹으려는데 어쩐지 젓가락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런 내 모습에 온이는 "엄마 기분 안 좋아?"라고 물었다. 기운이 없는 거였는데 기분이 안 좋아보였나보다. "아니.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힘이 없네. 머리가 좋아하는 쌀국수 먹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 하며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맥주를 꺼냈다. 손끝에 닿은 얼얼한 차가움 덕분에 머릿속 한구석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온이는 야채가 가득 든 분보싸오를 보니 베란다에서 키우고 있는 상추가 생각난 모양이다. "엄마 상추 따와서 먹어도 돼?"라고 물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진이는 온이를 졸졸 따라 나갔다. 아이들은 자기 손바닥보다 작은 상추를 씻고 국수와 함께 싸 먹었다. 내 몫도 한 장 나누어 주었는데 아주 부드러웠다. "온이가 잘 키웠네"하니 아이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설거지를 온이는 숙제를 진이는 그림 그리기를 했다. 양치하기 전에는 다 같이 냉동실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난 뒤 함께 모여 누리는 달콤한 맛.

    나도 아이들도 떨어져 있던 시간을 모조리 말하고 듣기는 어렵다. 그저 아이들도 자기만의 삶이 버거운 날이 있겠지, 있을 테지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런 날에도 특별할 것 없이 언제나처럼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내 곁에 아이들이 있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 일과를 마치고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잠들기 전에 안아주는 시간이 오래오래 쌓여가기를 소망한다. 반복되고 짤막한 시간이 새로운 날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특별한 에너지가 되어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상 가장 친밀한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기쁨이 깃들어 있는 시간.




Photo by @Ethan Hu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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