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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 Descansador Jul 18. 2021

선한 인간에 대한 과학적이고 희망적인 고찰

[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서평

 그런 책이 있다. 아직 책이 끝나기에는 한참 페이지 수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절반을 넘어 남은 책장의 수가 읽은 책장 수보다 더 적어질 때부터 알 수 없는 초조함과 아쉬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런 책.  브레흐만의 책이 그러했다. 그가 인간 본성의 선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 조사를 하고, 그의 주장에 대한 반박의 반박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긴 외로움을 시간을 보냈을지도 감히 가늠이 잘 되질 않았다. 인간이 한없이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또 야만적이어서 문명의 발발과 진보가 비로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다’는 주류 이론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브레흐만은 힘있게 고개를 좌우를 젓는다.  그는 인간은 문명이 있기 전에도 충분히 지성과 따뜻한 마음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며 우리가 이룩한 거대한 문명은 오히려 이러한 인간의 참된 본성을 왜곡하고, 현대 미디어는 이를 계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이 책이 특히 더 감명깊었던 건 저자가 충분한 근거 없이 그저 이상주의적으로 인간을 선하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꼬집어서 하나 하나 비판했던 연구들은 사회학, 심리학 등 다방면에서 학계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실험과 연구들이었다. 그는 이 연구들의 녹취록을 추적하고 당시의 실험 대상자들을 인터뷰하는 등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 역사적인 실험들이 많은 측면에서 처음부터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결론이 정해져 있었으며 연구 과정의 군데 군데 해당 결론에 이르게 하도록 하기 위한 인위적인 장치들이 있었음을 밝혀낸다. 심지어 브레흐만이 이 점을 지적하기 전에도 연구들의 허위성을 지적한 다른 연구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렵지 않게 묵살되었다. 해당 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교수들이 끝없이 펼쳐진 정보의 바다에서 그들이 전달하기를 원하는 정보만 편집하여 미디어에 노출시키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브레흐만은 사피엔스가 그들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인하고, 지능적으로도 더 뛰어났던 네안데르탈인을 능가할 수 있었던 이유로 친화력과 학습, 모방능력을 꼽는다. 네안데르탈인은 지능적으로 사피엔스보다 분명 뛰어났지만 이러한 지식을 무리의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 확장하고, 재창조하기 위한 사회성이 사피엔스보다 부족했다는 것이다. 반면 사피엔스는 지능은 좀 모자를지 모르나 무리의 다른 이들과 곧잘 어울렸으며, 그런 특유의 친화력 덕분에 삶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서로 전수하면서 집단적으로 함께 나아질 수 있었고, 이것이 그들을 최종의 승리자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전 범위에 걸쳐 브레흐만은 인간이 갖는 친화력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인간 본성의 핵심으로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이로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를 확장해나간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계속적으로 재발견하지만, 동시에 정확히 이러한 본성 때문에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들도 일어나게 되었음을 시인하면서 안타까운 속내를 내비친다. 이와 관련하여 책에 소개된 실험 중 매우 흥미로웠던 것 하나를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실험은 아기들이 선함과 악함에 대한 태생적인 판단능력을 파악하고자 고안된 실험이다. 실험자들은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아기들을 위해 일종의 ‘무언의 연극’을 통해 두 가지 사람 유형을 구현해낸다. 한 사람은 타인의 어려움을 보고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 실험에 참여하는 아기들은 아무 사전 교육이 되어있지 않았음에도 예외 없이 직관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핵심은 그 다음이다. 


이번에는 다른 아기 그룹을 대상으로 해당 실험 이전에 하나의 실험을 추가했는데, 이는 매우 간단했다. 과일을 몇 개 제시한 뒤 아기들로부터 과일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실험상의 연극에서 연기할 사람들(편의상 이하 ‘배우’로 통칭)이 선호하는 과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런 뒤, 아기들로부터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하였다.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듯이 아기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과일과 동일한 과일을 좋아한다고 밝히 배우들에게 높은 호감도를 보였다. 이러한 선택 과일에 따른 호감도 조사가 선행된 뒤, 앞 문단에 언급한 연극을 보여주고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를 다시 조사하였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아기들은 자신이 높은 호감도를 가지고 있는 배우가 비열한 연기를 했을 때에도 그에 대한 높은 호감도를 유지했다. 이 실험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은 선함에 대한 태생적 선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다른 특징이 함께 주어질 때, 선악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죽마고우를 끝까지 옹호하는 친구의 예로부터, 나아가 자신이 동일시하고 존경하는 통치자가 주도하는 전쟁과 인종청소와 같은 극단적인 행동들을 동조하는 군인들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브레흐만은 또한 인간이 가지는 공감능력이 갖는 동전의 양면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공감에 대해서 생각할 때 마치 모든 인류를 아우르는 태양빛과 같은 넓은 범위를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보이는 공감의 속성은 오히려 제한된 범위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와 같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을 참전했던 군인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도, 리더에 대한 존경도, 사회적 출세도 아니었다. 그들의 답변은 ‘전우를 위해서 용감히 싸웠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다는 전우애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그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위해 누구보다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이들이 보였던 전우에 대한 뛰어난 공감과 이해는 적군의 더욱 많은 사상자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친화력과 공감능력이 갖는 양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멈출 수 없었던 생각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래, 브레흐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많은 긍정적인 특질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본성을 극대화하고 사회의 핵심적 양분으로 삼기에는 인간의 문명사회가 너무도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닐까? 마치 우주가 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위 아기 실험에서 살펴 보았듯이 인간은 자신과 뜻이 맞고 유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직관적으로 높은 선호도를 지니게 되고, 이들은 모여 집단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인구가 많아지고 사회가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지면서 이러한 다양한 이해를 지닌 집단이 무수히 많이 생겨나버렸다. 설사 각 집단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선이 되는 행동을 한다고 하여도 이는 매우 제한적인 선이며, 타 집단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오히려 악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복잡성도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하는 걸까? 라는 감당안되는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와 유사한 학자로서의 브레흐만의 고뇌가 책 군데 군데에서 느껴졌다. 그가 소개하는 방대한 연구들을 접하면서 인간은 참 모순적인 존재이고, 이러한 모순적인 존재들이 모여사는 인간사회는 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브레흐만은 계속적인 모순의 난관들 속에서도 인간의 선한 본성과 그에 대한 사회 공동적인 믿음이 뒷받침될 때 어떤 사회의 모습이 될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고자 논의를 계속적으로 진행한다. 이 부분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 책을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린 결말로 두고 말을 아끼고자 한다. 


책이 진행되면서 저자는 어느 발견에 대해서는 실망스럽거나 좌절하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담아내는데 그런 그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그의 진정성이 더욱 느껴지게 했고,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저자와 함께 차근 차근 탐구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 책을 읽는 내내 참 즐거웠다. 내가 대학교 때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반가운 동시에, 어쩌면 내가 수많은 배움들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흡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뉘우침 또한 들었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써는 이 책을 덮으면서 다시 한 번 그 생각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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