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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Oct 26. 2019

목장

머슴 K

너른 논두렁을 구불구불 지나 산등성이가 시작되는 어느 지점에 아버지는 목장을 열었다. 아버지가 목장주로서 얼마나 경영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유를 내는 목장으로 젖소는 송아지를 포함해 열다섯 마리 남짓 되는 규모였다. 목장 등허리로는 3 정보쯤 되는 산이 이어졌는데 뽕나무 밭으로 시작해서 능선을 따라 커다란 밤나무가 제법 무성했다. 가을에 토실한 밤을 따는 일은 흥겨운 일이었다.


목장 일이란 대체로 축축한 일들이다. 새벽부터 젖을 짠다. 젖이 가득 차 퉁퉁 부어오른 암소의 커다란 유방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잘 마사지해주는 것으로 착유 코스가 시작된다. 기계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마사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착유량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혹여 너무 거칠게 다루면 유방염이 생기고 젖에 피고름이 섞여 나오기도 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적당한 때 짜주지 않으면 암소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좋지 않다. 착유가 끝나면 사료를 먹이고 축사 밖으로 내보내서 움직이게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운동량이 부족하면 여러 가지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다. 병이 생기면 짐승도 짐승이지만 치료비며 착유량 감소 등 번거로운 일이 생긴다. 사료만으로는 부족하니 부지런히 산이 들에서 풀을 베어 날라야 한다. 짐승은 생각보다 많이 먹는다. 해거름이 되기 전 풀어뒀던 젖소들은 다시 축사로 불러들인다. 저녁 사료를 먹인 뒤 낮 동안 오염된 몸에 물을 뿌려 씻어준다. 잠자리가 축축하면 병에 걸리므로 마른 볏짚을 잘 깔아주고 아픈 녀석은 없는지 관찰한다. 그리고 나서야 목장의 하루는 저문다.


이런 일은 머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목장을 경영하는 동안 두 번쯤 머슴을 들였다.  그중 한 명은 노총각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그는 방위병 복무를 마치고 아버지 밑에 들어왔다. 나는 어렸고 그는 젊었다. 그와 나는 간혹 지게를 각자 지고 산등성이를 따라 풀을 베러 갔다.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일은 능숙했다. 일을 하다 쉴 때 간혹 그는 작은 오리나무 가지나 아까시나무 가지를 주워 낫으로 그것들을 다듬어 이런저런 동물 모양이나 물건들을 만들곤 했다. 장화를 신고 산등성이를 따라 난 좁은 풀밭 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물컹하고 뭔가가 밟히곤 했는데 그건 십중팔구 뱀이었다. 아버지의 산에는 뱀들이 많았다. 길고 몸뚱이 가운데가 두껍게 살찐 것이 능사였고 풀섶을 따라 화살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것들은 청사였다. 머슴 K는 뱀을 잘 잡았다. 상처가 없는 능사는 아버지에게 가져갔고 아버지는 소주 대병에 머리부터 집어넣어서 뱀술을 담가 마당 가에 묻곤 했다.


어느 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닭죽 냄새가 시장한 내 배를 괴롭혔다. 어머니는 닭죽이라며 멀건 죽을 한 그릇 내놓았는데 보여야 할 닭고기가 없었다. 누군가 먼저 먹었겠거니 생각하고 맛있게 먹고 나자 K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내가 지금 막 먹은 것이 뱀탕이라고 말했다. 닭고기는 없었지만 어쨌든 적잖이 맛나게 먹은 나로서는 불평할 입장은 아니었다. 다른 날 마당 가에서 인부들이 모여 서서 장어를 굽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도 한 점 얻어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뱀고기였다. K는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버지의 목장은 때마침 불어닥친 소파동에 휩쓸려 고전하다가 이내 문을 닫았다. 아버지가 그 일로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나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목장을 정리하고 그다음 산을 판 뒤, 스무 살 넘어서 딱 한 번 그 동네 어귀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마을 입구에서 내리면 면사무소와 방앗간, 그리고 술도가가 있고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거기서 굴러 내릴 듯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면 사오십 미터 남짓 될까 싶은 콘크리트 다리가 강에 걸렸는데, 거기서 목장 쪽을 바라다보면 아득히 젖소들이 놀던 그 마당이 아지랑이 너머로 아련했다. 그저 거기까지 바라보고 돌아선 뒤 다시는 그 벌판에 가보지 못하였다.  




[사진출처: 대관령하늘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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