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박스까기
제주에 이사왔다. 벌써 일 주일이 넘었다. 그 사이 정말 정신이 없으면서도 아무것도 안했다. 상반되는 두 종류의 행위가 함께 존재하다니 이상하지만 내 하루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저게 바로 바쁘면서도 한가한 거구나. 하루에 서너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하는데, 그 외에 시간에는 정말 바쁘게 잠을 자고 (요새 잠을 진짜 잘 잔다), 강아지와 산책하고, 혼자 산책하고 (강아지 분리불안 교육 중이어서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집을 떠나야 한다), 밥을 하고 (지금까지 단 두 끼만을 시켜먹었다, 치킨 두 번), 무엇보다도 박스를 깐다. 박스를 정말 많이 깐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박스를 깐 적이 없다.
우선 자동차로 다 실어오지 못한 짐을 택배로 부쳤는데 그게 라면 박스로 일곱 개였다. 그리고 쿠팡에서 주문한 크고 작은 것들, 예를 들면 냄비나 후라이팬, 향신료 같은 것들이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박스에 담겨왔고, 멀리에서 마음으로 보내준 집들이 선물을 받았으며, 이케아에서 구매한 물건들이 왔다. 이제 강아지가 택배 아저씨들이 와도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다.
엄마가 박스 커터 챙겨가랄 때 챙겨올껄. 처음에야 박스를 까면서 어차피 테이프를 다 제거해서 배출해야 하니 굳이 박스 커터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까는 박스 갯수가 15개를 넘어가면서, 종이 면이 무척 거칠 뿐더러 찐득하게 붙어있는 테잎을 손 끝으로 긁어내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30개가 넘어가자 웬만한 핸드크림으로는 손 회생이 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바세린에 가까운 불편한 핸드크림을 사 바른 후에야 조금 피부가 가라앉았다.
대신 집은 점점 예뻐진다. 오늘은 방 세 개 중 요가용 방에서 쓸 조명과 전구, 러그가 왔다. 집 안에 거슬리던 주광색 전구를 전구색 전구로 바꾸었다 (주광색이 흰색이고 전구색이 주황색 조명이라는 건 몇십 번을 보아도 어색한 것 같다). 노란색 카우치와 흰색 커피테이블에 잘 어울리는 회색 러그를 보니 그 위에 누워있는 흰색 강아지가 더 예뻐보인다. 2층 넓은 테라스에는 바닷가에서도 쓸 수 있는 접이식 의자가 놓였고 오피스룸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쌍둥이 책상에는 나와 남편의 취향이 담긴 조명이 올라가있다. 이제 거실에 둘 작은 장식장과 거실용 장스탠드가 더 와야하고, 손님용으로 구매한 데이베드와 데이베드용 침구, 요가방에 둘 작은 재단용 벤치가 오면 정말 완성이다.
내가 산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첫 집이라는 것, 이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 이 안에 사는 구성원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남편을, 남편은 나를 선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가 강아지를 선택했다. 강아지도 길 생활이나 보호소 생활보다는 우리 가정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문도야?). 언젠가 내가 장기 여행을 떠난 것은 이곳에 태어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떠난 후 다시 이곳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은 기억이 있다. 나는 매일 이 사람과 이 강아지와 이 집에서 살 것을 선택한다. 박스를 까고 손끝이 상하면 서로의 손에 연고를 발라주고 다시 박스를 깔 것을 선택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