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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an 07. 2023

크리스마스, 하면 명동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크리스마스와 TV와 서울과 엄마에 얽힌 이야기

 내가 경상도에서 올라온 촌놈이라 그런지 몰라도 크리스마스, 하면 '명동’의 풍경이 떠오른다.


 서울에 살기 전에는 막연한 환상이었고 서울에 살면서부터 실제로 그 안에 섞여 들었던 풍경. 거리를 채운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 노점상에서 파는 떡볶이며 호떡이며 조잡하지만 왠지 따뜻할 것 같은 털장갑과 모자, 명동성당에서 올리는 고요한 미사, 땡그랑댕그렁 울리는 구세군 종소리, 잡고 있는 연인의 손이 추울세라 더 꼬옥 붙잡는 손짓, 은은하게 귓가에 울리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와 성탄절에 눈이 왔으면 한다는 내용의 캐럴, 여기저기에서 반짝이며 눈망울에 별빛을 심어주는 트리 불빛들까지. 이 모든 걸 12월의 명동에서 볼 수 있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도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으레 명동 거리를 걸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걸으면서, 평소엔 가지 못했던 근사한 곳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극장으로 가서 재미가 있건 없건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고, 가끔은 노점상에서 파는 소소한 물건들도 사고, 자리를 옮겨 이태원에서 칵테일을 한 잔 하고, 어느 해부턴가는 (결혼 전이라 아직 여자친구이던) 아내가 사는 집에 들러 아내의 가족들과 꾸민 트리 옆에서 야식을 먹고, TV에서 틀어주는 연말 시상식이나 가요대전 같은 걸 함께 봤다. 한참을 보다가 지루해지면 고스톱을 치거나 루미큐브 같은 보드게임을 했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랬고 결혼한 후에도 그랬다. 그야말로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서울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왜 연말에는 으레 명동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여름이면 생각나는 장면 역시 늦은 밤 한강 둔치에 나와서 돗자리에 눕거나 앉은 채 부채질하던 서울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귓가에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자동 재생된다. "오늘 저녁에도 열대야를 피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그리고 누군가가 인터뷰를 한다. 자막으로 OO동 김 아무개라는데 서울 사람이 아닌지라 내게는 낯선 동네의 이름이다. 명절에도 마찬가지다. 교통수단을 탔을 때 걸리는 시간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혹은 서울에서 대전까지, 또는 어딘가에서 서울까지가 기준이다. 봄의 벚꽃 축제 역시 여의도 윤중로를 배경으로 했고, 소풍이며 수학여행 철에는 롯데월드와 서울랜드, 어린이대공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화면으로 엿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TV에서 틀어주는 장면들이었다. TV를 오래 보고 있으면 어떨 땐 내가 꼭 서울에 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 대한 불신의 싹이 조그맣게나마 틔워진 때가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전화국에서 114 교환원으로 근무하던 어머니께서 며칠간 집을 비우셨다. 당시 한국통신(지금의 KT) 민영화 반대 투쟁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신 것. 나도 잘 알던 어머니의 직장 동료,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날더러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달달한 간식거리를 손에 쥐어줘서 좋아라 했던, 분들과 함께 단체로 검은 조끼를 입고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대절한 관광버스에 올라타서 가셨다.

 “엄마, 오데 가는데? 오늘 집에 안 오나?”

 “오늘 몬 온다. 아빠하고 밥 잘 챙기묵고. 엄매는 나쁜 사람들하고 싸우고 올 기라.”

 그땐 어머니가 하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슈퍼맨이 빨간 망토를 두른 것처럼, 같은 색의 빨간 머리띠를 두르면 힘이 더 솟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그날 밤늦도록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TV에서 9시 뉴스까지 보게 됐다. 평소에는 이 시각까지 깨어있질 않아서 오랜만에 보는 뉴스였다. 하품을 하면서 이런저런 재미없지만 중요하다는 소식들을 보고 들었다. 어른들은 이게 뭐라고 매일같이 챙겨보는 걸까. 엄마는 진짜 안 오려나 보다 이제 그만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가 끝날 때 즈음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한국통신 직원들이 '데모'를 했다는 짤막한 소식이 나왔다. 울고불고 악을 쓰고 왠지 무서운 느낌의 노래(훗날에야 그게 민중가요라는 걸 알았다)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저어기 뒤쪽에는 왠지 어머니의 얼굴과 똑 닮은 사람이 보이는 듯했다. 긴가민가했다. 다들 같은 조끼를 입고 빨간 머리띠를 둘러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뉴스에서 보던, 데모라는 걸 하는 사람들은 다들 나쁜 사람 같아 보였는데. 우리 엄마도, 엄마 친구들도 모두 착한 사람들이고 사회에 해라고는 조금도 끼치지 않고 살았던 좋은 분들인데 왜 데모를 하러 간 걸까. 내가 알기론 분명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그렇다면 그동안 TV에서 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어쩌면 다 좋은 사람, 평범한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의문이 채 풀리기도 전에 어머니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셨다. 수십 년 동안 다닌 지긋지긋한 직장 생활 때려치워서 좋다고, 이제 야간 교대 근무도 안 하니까 온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같이 퇴직한 동료분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희미하게 웃으셨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웃으셨던 것 같다.


 그나저나 집회인지, 투쟁인지, 싸움인지, 외침인지, 데모인지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 그것도 역시나 서울로 올라가서 해야 되는 것이었다. 그놈의 서울, 그놈의 TV. 그런데 어른이 된 나는 서울에 살면서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절박한 목소리를 외치는 장면들이 여전히 TV에 종종 나온다.




(2022년 12월, 서울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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