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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ie Sep 10. 2021

Good Bye My Friends

작별을 고하다


2021년 여름.


센터에서 환자들과 일한 지 어언 8년이 되어간다. 여태까지 암 환자들이랑 같이 일 하면서,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많이 배우고, 오히려 에너지를 많이 얻고 집에 돌아오고는 했었다. 죽음을 항상 많이 대하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힘들고 씁쓸한 여름을 나고 있는 중이다.


GOOOD BYE MY FRIENDS


1. Allen 아저씨


지금 일하고 있는 외래 센터에서 일 한지 이제 5년이 넘어가는데, 내가 일을 처음 시작하고 만난 알렌 이라는 아저씨는 보잉에서 일하시는 아저씨였다. 뇌종양으로 판정을 받는지 몇 년이 지난 시기였는데, 'Donna'라는 아내와 항암 치료를 꾸준히 받으러 이주에 한 번씩 오고는 했다. 머리에 종양이 있어서 가끔 말을 더듬을 때도 있었지만 너무나 착한 아저씨였다. 우리는 자주 봤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의 첫 임신 기간 내내 나의 안부를 물었던 아저씨였다. 첫 아이를 낳기 전 나에게 아줌마는 직접 뜨개질을 한 이불을 선물로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이불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일을 이틀로 줄이니, 아저씨를 만나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아저씨는 IV항암치료에서 집에서 복용 가능한 항암약으로 바꾸며 한 달에 한번 의사를 만나러 왔는데, 항상 5층 내가 일 하는 곳에 와서 인사를 해주고 집에 가곤 했다. 그 뒤로는 나는 다운타운이 아닌 다른 곳으로 와서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의 이메일 안부가 시작되었다.


아저씨는 내가 아이 때문에 바쁠 때도 한 번씩 이메일을 보냈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이메일을 보냈다. 가끔 아이를 데리고 나가 커피도 한잔 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가끔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제는 아이들이 둘이라서 잠깐의 마음의 여유도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8월 8일 저녁 10:15분쯤 시계를 보다가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다음날 출근을 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출근을 했는데, 내 앞으로 컴퓨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8월 8일 저녁 10시 조금 넘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메시지였다. 2개월 넘게 병원에 있다가 인튜베이션을 그만하고 싶다고 의사표현을 가족들과 의료진 앞에서 하고 2시간이 채 되지를 않아 중 환자실에서 5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59세.... 얼마나 젊고 할 것 많은 나이인가? 을 그만두고 얼른 아줌마랑 크루즈 여행을 할 거라고, 유럽을 가보겠다고 했는데, 그 많은 바람을 몇 개 못 이루고 너무나도 짧게 생을 마감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소중한 친구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냈다.



 2. My friend Jenny


예전에 2년 정도 같이 일하던 제니라는 간호사는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좋은 동료였다. 그러다가 나는 두 번 정도 일자리를 옮겼고, 지금 일하는 암센터에서 제니를 다시 만났다. 제니는 여전히 이뻤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자와 간호사로 만났다.


제니는 유방암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다가 우리 쪽으로 온 환자였다. 항암도 씩씩하게 잘 이겨냈고, 집에서 항암약을 먹으며 암과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둘째를 낳으러 출산휴가를 갔고, 다시 돌아왔을 때 제니는 다시 항암을 받고 있었는데, 상태가 안 좋아져서 나는 처음 보는  약으로 항암을 받고 있었다. 보통 잘 안 쓰는 약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항암치료제가 듣지 않아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복수가 점점 많이 찼고, 점점 더 힘들어했으며, 아파했다. 외래로 전화하는 경우가 늘었고 아픔을 호소하는 시간이 늘었다. 갑자기 간수치가 올라가고 찍어본 CT에서 줄어들기는커녕 빠른 속도로 퍼진 암덩이가 간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제니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피부는 황달이 심했고, 먹지를 못해서 수척해졌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까맣고 많던 머리카락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었고, 아파서 찡그리는 시간이 많아져 갔다. 병원 응급실로 들어와 병동으로 올라가서 이제는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집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집에는 19살짜리 어티즘가진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에서 엄마의 죽음이 혹시 트라우마를 줄까 봐 였다. 제니의 남편은 투 잡을 뛰면서 아이와 아내를 돌보았지만, 그 얼굴에는 지친 기색 없이 항상 제니 옆을 지켰다. 월요일 화요일 일이 끝나고 나는 어김없이 제니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가서 한 시간, 두 시간 제니 옆을 가족들과 지켰다. 제니는 눈 뜰 힘도 남아있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다음 주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나는 제니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제니는 목요일 우리의 곁을 떠났다. 44세의 나이로 너무나도 일찍 남편과 아이를 놔두고 하늘나라로 갔다. 하늘나라에서는 고통 없이 행복만 가득하기를....




3. 우리 Larry 할아버지


우리 외래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라면 이 할아버지를 모르는 간호사가 없다. 바로.. 우리의 래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정말 나이스 한 신사였다. 간호사가 채혈을 잘 못해서 바늘로 몇 번을 찔러도, 피를 실수로 덜 뽑고 보내서 다시 오라고 전화했을 때도 화 한번 내지를 않으셨다. 항상 모든 간호사들을 잘 대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MDS라는 한마디로 백혈병 전 단계의 혈액을 판정받았는데, 그것 때문에 수치가 많이 떨어져서 수혈 또는 소판 수혈을 많으면 일주일에 두, 세 번도 해야 하는 날 들이 많았고, 좋아하는 골프도 여행도 갈 수 없는 날이 더 많이 지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삼 년이 넘는 시간을 통해 알았고, 죽기 전에 친구들과 멀리 가서 골프를 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이주일 넘게 보이 지를 않았다. 그리고 와서 다시 시작된 채혈과 수혈의 반복. 그리고 몇 달 후 어느 수혈도 받지 않을 테니, 호스피스 하고 싶다고 와서 의사를 만난 후 우리 클리닉에는 다시는 오지 않으셨다.


집에서 호스피스로 3개월정도 지난 이번여름 8월.... 8월 9일 우리 래리 아저씨를 떠나보냈다. 화요일 아침마다 간호사/의사들이 모여서 클리닉이 오픈하기 전에 우리 곁을 떠난 환자들 이름을 부르고 잠깐의 시간을 갖으며 환자들을 추모한다. 할아버지의 이름이 불려졌던 순간, 모든 간호사들을 눈물을 글썽였고, 아침 허들을 해야 할 수간호사는 엉엉 울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그만큼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향 76세, 래리 할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곳에서는 수혈 없이 어지럽거나 숨이 차지도 않을 테니, 원하는 만큼 골프를 치고 웃고 있기를... 바본다


Good bye my friends...

2021년 어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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