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노블 03. 오디세이
너무나 익숙한 신화의 전혀 다른 변주법
-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라본 영웅 오디세우스
신화와 고전을 주로 다뤄온 독특한 경력을 가진 작가 가레스 하인즈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스 고전 오디세이를 다시 그렸다. 한때 국내에서 가나출판사가 제작한 학습만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심지어 올림포스 가디언이란 이름으로 애니메이션화 되기까지 했다!-분명 이 만화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한 세대가 꽤 될 것이다. 만약 그중 한 명이었다면, 가레스 하인즈의 <오디세이>는 특히나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가레스 하인즈는 '신화'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예스러운 표현 양식을 취한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그래픽 노블들 속에서 연필선처럼 보이는 수수한 드로잉과 수채화를 이용한 <오디세이>의 작화 방식은 역으로 돋보인다. 화려하진 않지만, 신화와 고전이 가진 고유의 정서를 잘 드러내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화와 고전은 언제 읽어도 우리 삶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아래의 상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처음 <오디세이>를 집었을 때는 ‘에- 신화라니 시시해’라는 생각을 은근히 했었다. 펼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림체도 밋밋, 흐릿 심심해~라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처럼 아마 책을 처음 펼치면서 '아~ 나도 이미 다 아는 내용인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될 것이다. 하지만 대서사시의 상징인 오디세이의 여러 모험 에피소드들을 어떤 방법으로 엮어냈는지, 이야기 구조에 집중해서 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만큼 책 전체에서 작가의 능숙한 이야기 구성력이 돋보인다.
이야기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영광스러운 모험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가까스로 떠나는 모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가족의 위기를 겪으며 아버지의 위엄과 영광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여행.
이런 구성 덕에 독자는 초반에 ‘오디세우스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언제 나와?’라는 호기심으로 긴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을 받는다.
물론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고난과 모험들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대신 이를 알키노오스왕에게 오디세우스가 이야기하는 방식을 빌려 지루함을 덜고, 훨씬 빠르게 진행시킨다. 하마터면 오디세이의 모든 고난과 시련을 줄줄이 이야기하는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데 이를 영리하게 편집하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헤라클레스처럼 신의 영역에 다른 우월한 영웅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아들의 아버지, 아내의 남편으로서 인간 오디세우스를 그리는 작가의 관점이다. 책 전체를 통해 이 이야기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이를 되찾기 위한 한 남성의 고난이라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런 시각은 이미 익숙한 영웅의 고난에 인간적인 개성을 부여한다.
그래픽적으로는 '신화'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오디세이>는 말풍선과 그림 칸에 충실한 다소 교과서적인 구성을 갖고 있다. 큰 말풍선 속 깨알 같은 글씨는 어쩔 수 없이 학습 만화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기에 정갈한 사각형의 화면 구성과 평탄한 수채화 채색은 자칫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원작에서 그랬는지, 식자 과정에서 바뀐 건 지는 모르겠지만 화풍의 섬세함과도 어울리지 않는 투박함은 상당한 아쉬움을 준다.
그러나 칼립소를 떠나 바다를 항해하는 장면에서 바다와 파도의 표현을 보면 수채화의 질감과 감성이 충만하게 전달된다. 특히 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한 바다 장면은 대자연 앞에 무력한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절절히 담고 있다.
담백한 연필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된 영웅의 몸들에선 숙련된 작가의 데생을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형형색색의 그래픽 노블에 비하면 지나치게 수수한 표현이지만 오히려 누구나 알고 있는 신화라는, 다소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판타지적이고 오래된 이야기를 관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이야기에 걸맞은 형식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 아들과 아버지와 함께하는 전투 장면은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과 이미지가 주는 즐거움이 가장 잘 결합된 장면이다. 이야기로서는 가족의 재회와 세대적 결합을 보여주며 주제의식을 표면화하고, 이미지로서는 잔잔하게 흘러온 듯한 전체 구성에서 가장 속도감 있고 격렬한 전투 장면을 보여주며 강, 약의 변화로 눈을 즐겁게 한다.
신화와 고전을 재구성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해온 작가라는 독특한 경력의 가레스 하인즈. 다른 작품에서 그의 이야기 구성 능력과 색깔이 어떻게 구현되고 발전되어왔을지, 호기심이 생긴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꼭 한국에 소개되길 바란다.
이런 연출 / 이미지가 좋아
집에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전투를 위해 첫 활시위를 거는 장면.
수수한 그림으로 일관하던 책임에도 이 장면은 어찌나 생동감 있는지!
스토리가 가진 긴장감과 액션의 속도감이 모두 잘 표현되어있다.
근데 이런 건..?
“참신한 그림체로 형식을 파괴하고, 삶에서 느끼게 되는 극단적인 감정의 순간을 캐치해서 읽는 동안 절절한 감동을 주는 작품 없나?!"
라는 생각으로 뭔가 그래픽 노블적인 그래픽 노블! 을 찾는 사람이라면 재미없다고 덮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단순히 ‘재미없다’라는 일차원적 표현으로 폄하하기에는 이야기와 시각적 구성면에서 탄탄히 짜인 이 책이 갖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절대 가볍지 않다.
취향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읽어보기에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신화를 그래픽 노블로 구현했다고 생각한다면 훨씬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글/그림: 가레스 하인즈 Gareth Hinds
원제: The Odyssey
역자: 황윤영
보물창고